프롤로그

by 해진

나의 영국살이는 생각지도 않은 일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신랑(구랑이 된 지 오래지만 그냥 아직 그렇게 부르고 있다. 양해해 주기 바란다)이 내뱉은 폭탄선언 때문이었다. 남편이라고 하면 너무 사무적인 느낌이 들어서 사실은 지금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산다. 소설가 박완서 씨도 자신의 글에서 남편을 '오빠'라고만 부르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서 무촌과 일촌 사이의 촌수가 헷갈리면 호칭은 그때 가서 정리하면 되니까. 어쨌든 우리의 신혼 때부터 속이 넓으신 시부모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으셨기에 지금까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알아서 긴다.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인지라 아직은 남의 눈을 생각해서 남편의 이름 끝에 적어도 ~씨라는 접미사는 붙인다. 그런데 이것도 조금 억울하기는 하다. 내가 남편보다 6개월 월상인데 남편은 나의 이름에 접미사 없이 그냥 부른다. 뭐,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억울할 것도 없지만. 나는 그보다 철이 덜 든 사람이라서 그렇다.


여기도 예의를 좀 차려야 하는 곳인 것 같아 신랑 대신 남편이란 말을 쓴다. 그런데 하루는 나보다 철분성분 함량이 높으신 이 남편이란 분이 갑자기 앞뒤 상황 다 생략하고 내게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까 말한 폭탄선언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뭐, 지금까지 일하느라 고생했는데 그래도 되지." 했더니 "정말 그래도 돼?"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러라고 했으니 오히려 불안했던 거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나의 계산된 속셈이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이런저런 공과사의 구분이 약간 애매한 일로 다 합해야 2개월 하고 보름이라는 두 번의 여행을 통해 영국의 맛을 본 나는 기회만 있으면 온 가족이 함께 그곳에 가서 한번 살아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늘 품고 있어서 남편에게도 나의 이런 생각을 몇 번이나 타진해 본 적이 있었던지라 "기회는 이 때다."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거다. 회사원 체질이 아닌 내가 생각할 때 한 회사에 코 박고 십 년 이상 근속이라는 것은 꿈에서도 불가능한 것이 나라는 사람이었기에 그도 그런 생활에서 해방되어 숨 좀 쉬고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몫했다.


이렇게 하여 남편은 당분간 정리할 것도 있고 해서 금방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어서 나는 독박으로 영국살이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 점점 힘에 겨워갔지만 얼마 안 있어 남편도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같이 일을 해 나갈 수 있어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복잡하다면 복잡한 여러 절차를 거쳐 런던을 경유해 영국의 남쪽 해안도시 본머스에 도착해서 시작한 우리의 영국 생활은 순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그동안 직장 생활하느라 늘 아쉬웠고 소원이었던 영어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고 나는 원래 일반적인 영국인들과는 잘 맞는 성격이어서 전생이 있었다면 내가 혹시 영국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지금 영국에서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우리 딸의 말을 빌린 거다.


우리가 처음 일 년 동안 살 집은 좀 오래되기는 하였지만 - 잘 아시겠지만 영국의 집들은 좀 과장하자면 백 년 된 집 정도는 말끔하게 수리를 하고 나면 새집이라 쳐준다. - 살만 했다. 현관 앞에 정원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중원과 후원도 있어서 꽃과 나무를 많이 좋아하는 나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꽃들을 사다 나르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토머스 무어의 유토피아에는 경쟁이라는 것이 없다. 하지만 정원을 잘 가꾸는 것에 대한 경쟁은 남아있어야 한다는 영국인다운 그의 발상에 공감하는 나였기에 내게 주어진 정원에 예쁜 꽃들로 채우는 것이 정말 신성한 의무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정원은 날로 풍성하고 푸르러만 갔고 그것을 날마다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2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