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진의 영국 생활기 2
그때까지도 그것이 문제인지도 몰랐다. 거의 한달이 지났는데 영국의 주택으로 이사올 때 꼭 하지 않으면 안될 인벤토리 체크라는 과정을 빼먹은 것이다. 본머스로 이주하기 전 그 시점에서 꽤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한달 정도 거주한 경험이 있고 나중에 가족들과 영국에 다시 오면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 점에 대해서 그 당시에 내가 머물다간 집주인인 올리비아와 꽤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건만 영국에는 집을 장기로 빌릴 때 그런 제도가 있다는 얘기를 못들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해외 이주자들을 위한 정보들이 지금처럼 범람하던 때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만 영국이주를 준비하는 기간이 길었어도 이런 낭패는 없었을거라는 생각을 하니 너무 서둘러 여기로 온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남편도 나도 모든 일에 세심한 편이긴 했지만 이런일이 생긴 원인을 짧았던 준비 기간에 돌렸다.
서둘러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인벤토리 체크에 관한 것을 물어볼까 하려던 그 순간에 랭기지 스쿨의 교장인 집주인의 학교에서 일하는 존이 마침 우리집 중원 한켠에 있는 학교의 비품을 보관하는 창고문을 열고 있는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슨 큰 일이나 난것처럼 존을 향해 후닥닥 뛰어갔다.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존이 조금 놀라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는 늘 여유 만만하게 인사를 나누면서 날씨에 관한 얘기 정도를 주고 받는 사이였는데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듯한 나의 모습이 평소와는 좀 달라보였던거다. 존은 곧 놀란 모습을 거두고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나에게 물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복잡하기 그지없는 계약서에 싸인하고 그 당시에는 거금이라고 생각했던 금액을 집주인에게 지불했으니 이제 그집에 들어가서 살기만 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인벤토리 체크인(inventory check-in: 이사 들어오기 전에 집의 상태를 점검하는 일)도 안하고 이집에 들어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존에게 물어 봤더니 이건 집주인 편에서 생각해도 잘못한 것이기도 하니까 당신이 교장선생님께 잘 말해 보겠으니 너무 걱정말라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집주인이 그때 우리와 계약을 하러올 때 Inventory List(재산 혹은 물품 목록)같은 것을 우리에게 제시한 적이 없지 않았던가. 집주인이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제시해서 우리가 그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서명을 해서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세입자인 우리가 책임을 져야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일단은 안심했다.
존이 교장선생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는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며칠 후에 학교에서 쓸 비품을 챙기려 창고를 찿은 그가 싱글벙글하며 내게 다가오며 했던 말은 나를 완전히 안도하게 했다. 교장선생님은 애초에 인벤토리 체크 같은 건 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조금 놀라운 대답이긴 하였지만 영국의 집주인이라고 해서 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하며 까다로운 규칙을 내세우며 세입자를 곤란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비싼 물건도 없었을 뿐더러 한국이라면 그런 종류의 가구나 물품 정도를 세입자의 집에 비치해 놓고 신경을 쓸 집주인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의 집의 물건이 내 눈에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집주인에게는 소중한 재산일 수가 있다.
존의 말대로 우리가 그 집을 나갈 때에도 집주인은 인벤토리 체크 아웃(inventory check-out)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집에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집주인에게 날짜를 어기지 않고 집세를 또박또박 잘 내었을 뿐만 아니라 집세를 지불하는 날이 주말이나 공휴일과 겹쳤을 때는 지불일을 당겨서 준 것과 그곳에 사는 동안 우리가 가꾸어나가야 할 정원을 잘 돌보는 일이 다 였다. 말은 이렇지만 넓은 정원을 잘 돌보는 것은 영국에서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원에 관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존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기억부터 정리해 보기로 하자.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