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해안도시 본머스 4

by 해진

가끔은 내가 옛날부터 그곳에서 살았던 것 같은 착각 아닌 착각 같은 것을 하고 산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우리가 다닐 교회 탐방을 한 것에 대한 얘기를 좀 해야겠다. 뭐 탐방이랄 것도 없었다. 나의 교회 정하기 첫 번째 원칙은 집에서 도보로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곳이어야 한다이고, 두 번째는 목사님의 설교가 어느 정도는 내 마음에 와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첫 번째, 두 번째가 마음에 들면 웬만하면 통과다. 그래도 밝히고는 지나가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 세 번째라는 것은 성도 간 교제의 퀄리티이다. 좀 따지긴 하지만 이건 나도 잘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심각한 비중을 두지는 않는다.


며칠을 이 거리 저 거리를 발품을 팔며 다니다 보니 드디어 우리가 다닐 교회를 찾았다. 무어다운(Moordown) 퀸 메리 에비뉴(Queen Mary Avenue)에 위치한 ‘Your Community Church’라고 자칭하는 76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Church of the Nazarene’이란 교회였다. 사실 교회 역사로만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도 교회 한 곳, 성당 한 곳, 무려 두 곳이 이미 100년이 넘은 곳이 있기에 그 교회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영국에는 수백 년 된 교회들이 많기에 76년 정도로 오래된 교회라고 명함을 내밀기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 정도 세월을 한 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교회라면 교회 근처의 Moordown이나 Winton의 주민들에게는 익숙할 테니까 우리가 믿어 볼만한 곳이라고 간주해 버렸다.

일요일이 되자 나는 가족과 함께 그곳에서 첫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 후의 새 신자를 맞이하는 성도들과 짧았지만 기분 좋은 교제를 나눈 뒤 우리는 바로 교회의 부속건물에 위치한 목사님의 사택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곳에서 차를 나누며 서로 인사를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 젊은 사모님이 워낙 싹싹하고 격의 없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다 유머까지 겸비한 사람이어서 나는 오랜만에 본머스에서 크게 웃었던 것 같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40대 초반의 젊은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우리와 잘 통했고 우리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대부분의 영국의 목사님들은 목사님이란 칭호보다 자신의 이름으로 불려지길 원했으므로 우리는 그를 아무 존칭 없이 ‘Stan’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사모님에게도 ‘Sue’라고 부르며 금방 친해졌다. 그리고 그 교회를 다니면서 우리가 잊을 수 없는 또 한 가족이 있다. 당시 프레이즈 팀(Praise Team)을 이끌었던 딸부자 Vic의 가족이다. 딸만 넷이었으니 그렇게 부를 만도 했다. 그의 부인의 이름은 Eve였는데 그녀 역시 빅과 함께 그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기둥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직업이 목수였던 빅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예수님과 외모마저 닮은 듯한 모습을 한 사람이었고 기타를 치며 프레이즈 팀을 리드하는 그의 변함없는 모습은 다른 성도들에게 늘 교회 안에서 본보기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그 교회의 예배 시간에 피아노를 담당했던 정말 연로한 피아니스트가 한 분 계셨는데 그곳에서 평생을 피아노 연주로 봉사하신 분이라고 했다. 당신은 늙어서 더 이상 그 일을 못하겠다고 하시면서 우리 딸에게 피아노 반주를 일임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목사님도 이미 동의한 일이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우리 딸이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고 계시다가 즉석에서 그렇게 정해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딸은 당시 13세의 나이로 창졸간에 영국 교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담당하는 반주자가 되어버렸다. 딸아이는 지금은 런던 중심가에 있는 글로벌 회사의 시니어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지만 어린 나이에 제법 큰 피아노대회에서 상위에 입상하여 오케스트라와 두 번 정도 협연한 경력도 있으므로 그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내 딸이 그 일을 잘 감당하리라고 확신을 하였으므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내가 걱정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는 듯 딸아이는 빅의 기타에 맞추어 피아노를 잘 쳐 주었고 덕분에 갑작스러운 교회 피아니스트의 은퇴에도 프레이즈 팀은 건재할 수 있었다. 또 딸과 나는 한 팀이 되어 교회의 행사를 위한 포스터를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다. 교회에서는 우리의 이러한 봉사에 흡족해했고 이것은 나중에 우리에게 큰 보상으로 돌아왔다. 목사님인 스탄이 우리 딸을 가상히 여겨 교회에서 주최하는 연주회를 열어 준 것이다. 그는 직접 포스터를 제작해서 동네의 전봇대마다 붙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그 당시에도 그렇게 전봇대나 길거리의 벽에 벽보나 포스터를 붙이는 것은 불법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어느 여름날 교회에서 우리 딸의 피아노 독주회가 열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가끔 엄마로서의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중에 우리 딸이 그때를 추억할 수 있게 그 포스터 한 장이라도 남겼어야 하는데라며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지나갔는데 그러지 못한 걸 지금 와서 후회하면 무엇하리. 동네 교회에서 연 소규모의 연주회로 관객 수도 백 명을 조금 넘은 걸로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다. 그때 이웃 동네에서 일부러 연주회를 보러 온 사람들도 여럿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이국에서 온 아이의 연주를 봐주러 그 저녁에 와 준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특히 스탄에게 감사한다. 베토벤의 곡들(Beethoven, OP. No 3와 Op. 53)로 이루어졌던 그날의 레퍼토리를 우리 딸이 얼마나 잘 소화했는지 나는 전문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만으로 나는 만족했다. 그저 열세 살 된 한국에서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 앞에 않아 베토벤을 연주한다는 것 만으로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딸아이의 연주를 진지한 표정으로 들어주고 아낌없는 박수와 갈채를 준 그때 그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무리 영국에서의 여러 가지 추억들이 우리를 붙잡아 맨다 해도 우리는 그로부터 몇 달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남편의 일 년 코스 영어공부 과정이 끝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해결해야 할 일들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하나하나의 추억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크게는 남편이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테니스를 치러 가다 넘어져서 오른쪽 엄지 손가락이 부러져 본머스 병원에 입원했던 일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빅과 목사님의 집에 초대를 받아 환대를 받은 일들, 어느 화창한 날에 이브와 도시락을 싸서 크라이스트 처치에 바람을 쐬러 갔던 일, 특히 본머스 해변에서 자주 맛보았던 초코 스틱을 박은 달달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맛에 대한 기억은 그곳에서 있었던 모든 기억들을 달콤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이스크림이라고 해서 다 같은 아이스크림이 아닌가 보다.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기분으로 먹었느냐가 비슷한 아이스크림의 맛을 다르게 느껴지게도 하나보다. 그리고 그곳 커뮤니티 센터에서 7개월 간의 자원봉사활동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활동영역에 큰 변화를 주었다.


아무리 본머스가 세계적인 미항 중의 하나라고 해도 나는 그곳의 아름다운 경관도 경관이지만 꽃보다 더 아름다운 본머스 사람들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도와주려는 마음씨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우리가 어딜 가도 봉사를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받은 대우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므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커뮤니티 센터를 떠나는 나의 손에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쥐어 주었던 무어다운 커뮤니티의 센터장이었던 메리, 딸아이에게 잊지 못할 연주회를 경험하게 해 준 나자린 교회의 목사님 부부, 그리고 프레이즈 팀의 기타와 찬송을 담당했던 빅, 우리와 종종 함께 식사를 했던 존, 내가 사랑했던 본머스의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갖은 색의 꽃들로 모자이크를 한 공원들과 라운드어바웃, 브라세이 로드에 있었던 정원이 예뻤던 우리 집, 모두 내 기억 속에서 영원할 것이다. 본머스여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 해진의 영국 생활기 1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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