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만 영국에서의 우리의 첫 집은 주택과 정원 3개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영국식 주택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집이었지만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 말끔히 수리를 한 것 같았다. 영국에서는 주택이 고풍스럽다고 하면 낡았다와 동의어가 될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보기엔 그런 요소가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나에게는 본머스가 처음이 아니었지만 남편과 딸에게는 이런 환경이 처음이어서 나보다 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파트에서 오래 살다 이곳으로 온터라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온 여행 가방을 열어 옷가지들이나 짐을 대충 정리하고 샤워를 한 다음에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와서 여기, 이렇게 누워 있다니 라는 생각으로 긴 여행으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워낙 올빼미라 별 시차적응이 필요 없는 나였지만 영 잠들기가 어려워 거의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은 것 같다. 이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내 마음속의 희망과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교차하면서 싱숭생숭해서 그랬나 보다.
아침이 밝자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해 놓은 것이 없어서 아침 식사도 하지 못한 채 슈퍼가 문을 열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서 좀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세인즈버리(Sainsbury’s;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슈퍼마켓 체인점)로 향했다. 없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온갖 식재료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지만 한국의 식재료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요즈음의 영국 슈퍼와는 달라서 라면을 찾기는 했지만 일본과 인도에서 수입된 것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욕심껏 담았다. 그래도 라면은 라면이잖아 라면서...
그날 우리의 아침식사 메뉴는 세인즈버리에서 구입한 모든 것으로 이루어졌다. 식빵이 있었기에 그것으로 토스트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었지만 간단하게 하기로 했다. 잠깐 예열해 둔 오븐에 미트파이와 피시핑거를 적당히 구워내어 라즈베리 잼이 듬뿍 든 도넛과 사과 몇 조각으로 대충 때운 끼니였건만 맛은 최고였다. 원래 인스턴트식품이 입에 착 붙는 건 있지 않은가.
슈퍼로 가고 오는 길은 또 얼마나 즐거웠던가. 아직 3월이라 많은 꽃들이 피어있을 시기는 아니라고는 하지만 따뜻한 해양성기후의 영향으로 그래도 제법 많은 종류의 봄꽃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지나친 거의 모든 정원에 색색의 귀엽고 앙증맞은 프림로즈들은 물론이고 노란 수선화들이 우리의 발걸음에 새로운 활기를 더해주었고 거기에 더하여 적잖은 눈호강이 되었다. 더구나 봄의 전령인 수선화는 우리에게 생기를 줄 뿐만 아니라 희망과 기쁨, 그리고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꽃이라니 본머스에서 우리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 되어 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수선화는 새로운 시작뿐만 아니라 자연의 재생을 상징하므로 그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선물로 느껴져 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더욱 밝아졌다. 아주 생경하지는 않다 하여도 그래도 이 낯설고 물선 곳에서 이 봄꽃들의 존재는 내게 조그맣지만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간밤에 잠을 설쳤기에 소파에 앉은 채로 10분 정도 눈을 붙인 후 내 발걸음은 어느새 자연스레 화원으로 향했다. 팬지와 프림로즈, 수선화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이 아름다운 정원의 나라라고 여겨져 꽃값이 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큰 오산이다. 가격이 적어도 한국의 1.5배 내지 두 배는 족히 되었다. 지금은 영국의 환율이 많이 약해져서 상황이 반대가 된 것 같다.
꽃집에 도착하자 주인이 꽃보다 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계획한 대로 팬지와 프림로즈 몇 개와 수선화 대 여섯 개만 구입하려 했는데 이직 계절이 이른 붉은 장미 한 다발까지 사버렸으니 과용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 정도 돈을 쓰는 것은 당연해 라면서 집에 도착하니 나를 맞으러 현관에 나온 남편의 눈이 내가 사 온 꽃들을 보자 두 배나 커졌다. 그러나 그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해진의 영국 생활기 10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