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fe asks...
한국에서 대학 입시에 좌절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을 때는
아예 정착하는 것도 꿈꿨을 법하다.
그런 희망을 안고 아득바득 8년을 버티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결정적 계기가 궁금했다.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 다시 오게 된 이유가 뭐야?
Husband says...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당시 일했던 일식 식당 사장님이 나를 잘 보셨는지 나보고 불법 체류를 하라는 거야.
왜냐고 물으니, 한 10년 정도 같이 일해주면 시민권, 영주권 따는 거를 도와주겠다는 거지.
원래 공부하려고 미국에 온 거지만
그때는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에 급급하니까 그 제안이 나쁘지 않게 들린거야.
그래서 엄마랑 통화하면서 그 얘기를 하니까 당연히 결사반대를 하셨지.
식당에서 알바하라고 유학 보낸 건 줄 알았냐며.
나 원래 엄마 아빠 말 잘 듣잖아ㅋ 그래서 바로 접었지.
그런 생각을 했던 내가 안쓰럽고 불안하셨던지 며칠 후 엄마가 다시 전화하셨더라고.
거기서 벌어봐야 온갖 생활비로 나가니 한국으로 들어와서 같이 살면 조금이라도 빨리 모으지 않겠냐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게 말이 되는 거야.
그래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어.
막상 한국에 와서 보니 엄마 아빠가 집도, 절도 없는 거야.
전셋집 구하기도 힘들어서 재건축을 앞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아파트에 사시는 것을 보고
그제야 엄마 아빠의 상황이 실감 났어.
정신 차리고 일자리를 알아보는데 내가 잘 알려진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식당 알바하느라 변변한 스펙도 없으니 처참하더라고.
'역시 한국에서는 안 되는 건가...' 싶어서 또다시 미국으로 향했어.
다행히 유학원 같은데 취직이 되어서 유학 온 한국애들을 돌봐주는 일을 했어.
아이들이 문제없이 미국 생활 정착하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가디언 같은 역할?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12명의 남자애들과 함께 같은 집에 지냈는데
대게는 한국에서 돈 많은 집의 문제아들이 많았지.
그래서 나에게는 학생마다 갑이 2명씩 있었어.
현지에서 말 안 쳐 듣는 유학생과 한국에서 나를 아바타처럼 조종하려는 학부모.
시간 차 때문에 낮에는 애들 돌보고,
밤에는 시도 때도 없이 연락 오는 학부모들 때문에 거의 24시간 대기 상태였어.
그래도 숙식은 제공되는 조건이라 군말 없이 일했지.
문제는 일한 지 1년 만에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터져서
그동안 돈을 원화로 받았던 유학원이 파산하게 되었지.
나는 다시 거리로 내몰렸어.
결국 한국으로 다시,
패잔병처럼 돌아왔지.
Wife thinks...
미국 생활을 한 번 접고 두 번째 다시 들어갔다 왔다는 건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실패의 트라우마가 있는 한국으로 들어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당시 대학 입시 실패의 기억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부동산 경매하고 고시원 하면서 겪는 별의별 사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남편이
입시처럼 시험 같은 걸 볼 땐 얼굴이 하얘지고 설사한다는 걸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짠하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