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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주방일만 하다가 어떻게 IBM에 취직했어?

by 잰걸음

Wife asks...

미국에서 두 번 정착 시도 실패 후 한국으로 돌아온 남편.

이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국에서 생존해야 하는데

그 흔한 자격증 하나, 토익 점수도 없었다.

생계 때문에 온갖 식당 알바만 섭렵하고

전공도 유명하지 않은 대학에서 산업디자인 그리고 화공이라는 희한한 조합임에도 불구,

놀랍게도 그 유명한 IBM에 취업했다.


쥐뿔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IBM에 취직했어?



Husband says...

한국 들어와서 이제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려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대학교 때 취업 준비한다고 자격증도 대여섯 개 정도 있더라고.

한동안 멘붕 와서 그냥 집 밖에 나와서 쭈그리고 앉아서 고민만 하다가

어느 순간 '일을 해야겠다, 그래도 사람 구실은 해야지...'라는 생각에

취업 사이트에 들어가서 열심히 이력서를 내기 시작해. 한 100군데 이상은 낸 것 같아.

이력서 쓰는 것도 어설프게 하나 쓰고 회사별로 복붙 하면서 조금조금씩 수정해 나갔는데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 연락 하나 없었지.

그래서 잘 안 알려진 중소기업 쪽으로도 전부 돌렸어.


그러다가 오산에 있는 한 작은 회사에서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어.

2008년만 해도 오산은 뭐 논두렁 밭두렁이었는데

어쨌든 처음 연락 온 곳이니 너무나 기쁜 마음에

지하철 1시간, 버스 3-40분 또 걸어서 한 40분을 갔어.

그렇게 면접을 봤는데 바로 출근하라더라.

그 회사는 마이크로소프트 라이센스 관련된 일을 하는 곳인데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상 가서 보면 정말 별 거 없었어.

근데 나야 미국 불법체류까지 고려한 사람이라 뭐든 감지덕지였지.


출근 첫날,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나름 정장을 빼입고 갔는데

셔틀버스를 타니 나 혼자만 그러고 나머지는 그냥 공순이 공돌이 느낌으로 편하게 입었어.

다들 날 좀 이상하게 보더라고.

복장뿐만 아니라 내 말과 행동이 조금 달랐는지

당시 같이 일했던 차장님은

'넌 여기서 일할 애가 아닌데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자주 얘기하셨어.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갑자기 이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딱 드는거야.

아빠에게 말씀드리니 이직 생각을 하고 있다면 기도원에 들어가서 3일 금식 기도를 하라고 하시더라.

평소 같으면 귓등으로 흘려들었겠지만 그땐 그냥 마음이 동하더라고.

그래서 아빠랑 아침에 얘기하고 바로 짐 싸서 기도원에 들어갔어.


기도원에 도착하니까 미국 유학 전에 비자가 안 나와서

교회 예배실에 누워서 하나님한테 미국 보내달라고 절규했던 그때가 생각나더라고.

금식을 시작하니 배는 고프고,

배가 고프니 머리도 아플 것 같아서 그냥 누웠어.

예배도 누워서 드리고 성경 읽는 것도 그냥 음성으로 틀어 넣고 반은 듣고 반은 자고 그랬던 것 같아.


그렇게 둘째 날, 갑자기 국제전화 한 통이 오는 거야.

그때 한창 보이스피싱이 유행하던 때라 일부러 안 받았어.

근데 계속 전화가 오니까 받았는데 싱가포르였어.

이직 생각하면서 이력서를 여기저기 넣을 때

IBM이라고 있길래 미국 기업이니까 또다시 불법 체류로라도 가고 싶다는 심정으로 그냥 넣었던거야.

그러면서 다짜고짜 임원 면접이 잡혔는데 내일 바로 올 수 있냐고 물어보길래

지금 지방에 있어서 내일은 어렵다고 하니까 내일이 아니면 안 된대.

3일 금식기도가 안 끝났는데 나가는 것이 찝찝해서

엄마와 통화하니까 하나님의 응답이실 수 있으니까 그냥 면접 보라고 하시더라고.


사실 왜 바로 임원 면접으로 직행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야.

보통은 인사부, 실무진을 통과해야 임원 면접일텐데..

그때는 뭣도 모르고 일단 면접하러 갔는데 비서가 상무실로 들어가라고 하더라고.

난 '상무'라는 직책도 그때 처음 알았어.


이것도 진짜 신기한건데,

내가 금식기도 들어가기 전에 마침 도서관에서 나이키 웹사이트를 분석하는 책을 빌려 봤었거든?

마침 면접 때 그 상무가 나보고 삼성 닷컴 사이트를 보여주면서 한번 분석해보라는거야.

그래서 가만히 봤더니 나이키 웹사이트랑 똑같았어.

책에서 본 대로 어떤 전략 하에 이런저런 기능과 디자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읊으니까

상무가 '너 어디서 배웠어?'라고 물어보길래

무슨 배짱인지 '이건 디자인 전공한 사람들은 기본으로 다 아는 내용입니다'라고 답했어.

그랬더니 그분이 '담주부터 수원 삼성전자 캠퍼스로 출근해'라고 하시더라.

난데없이 갑자기 IBM 컨설턴트가 된 거야..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해.

도대체 객관적으로 스펙이 너무 떨어지는 내가 왜??


굳이 추리를 해보면,

당시 상무는 능력이나 기술보다는 애티튜드나 임기응변을 봤던 것 같아.

너도 잘 알지만 오히려 난 극한 상황에서 더 밀어붙이는 성격이잖아.

그리고 나중에 들었던 건, 내 평소 말이나 글로 쓰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이랑 달랐대.

아무래도 8년간의 미국 생활이 나를 이질적으로 만들었고

주변에서 내가 이상하다고 얘기해 줄 친구들도 없었고

이력서, 자소서도 참고할만한 것이 없어서 그냥 맘대로 쓴 것 뿐인데..

물론 이게 다 하나님의 계획 하에 있었겠지.


아, 그 상무님 한 번 뵙고 싶네..



Wife thinks...

내가 남편에게 처음 이끌린 포인트가 자신감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경제적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결혼 자체를 포기한 상황이었다.

그런 자신감 덕분에 IBM 취업의 문도 열린게 아닌가 싶다.


우리 아들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지 애비를 닮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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