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대책회의: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역

by 김과장

"그럼 최소 5월까지는 부장님이랑 그대로 간다는 거네요."
"... 그럴 것 같아. 많이 답답하네. 나 담배 좀 피고 올게'

약간의 우울감을 곁들인 짧은 대화를 마친 뒤,
이차장은 담배 한 대 태우러 가자고 권유했다.
그 물음에 김과장은 아이코스 딸기맛을 핀다고 대답했고,
이윽고 이차장은 라이터와 담배를 챙기더니 혼자 밖으로 나갔다.
아이코스엔 딸기맛이 없었고,

그 말은 곧 비흡연자라는 뜻이므로.


투잡을 시작한 이후,

김과장은 서빙 알바에 적응하기 위해 씨름 중 인터라 여러모로 정신없는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정작 본업인 회사에서는 그보다 더 오래된 전쟁이 조용히 계속되고 있었다.


부장의 반년 넘게 이어진 직무유기에 대해
김과장은 팀장에게 여러 차례 우회적으로 문제를 전달했고,
선임 또한 사안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어필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한 마디였다.

'일단 너희가 좀 고생해 줘. 박부장은 내가 지켜볼 거야'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흐린 눈을 하고 있는 팀장을 보며
처음에는 둘 사이에 무슨 커넥션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됐다.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건 없건
박 부장은 팀장 본인이 직접 데려온 인물이었고,
그를 다른 팀으로 전배 시키거나 퇴사시키기 위해선
결국 본인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임원들 앞에서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팀장 본인을 포함, 팀 내 진급 대상이 많은 상태에서
승진대상자 발표와 연봉 계약이 끝나기 전 섣불리 이 문제를 공식화했다가

되레 우리 팀 전체가 꼬투리 잡히면 팀장말고도 승진대상인 김과장한테도 괜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팀장의 논리였다.

팀장 나름의 명분은 확실했다.
하지만 나의 승진을 위해서 눈앞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는 부장에게
아무것도 못하고 보고만 있자니 속이 뒤집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부장에 대한 신뢰는 이미 바닥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선임의 건의 이후 팀장은 그를 따로 불러
리더십 부재, 업무 태만 등에 대해 몇시간 넘게 소위 '정신교육'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 듣고 달라질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렇게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희 밥 먹고 나랑 얘기 좀 하자"

팀장에게 '나도 듣는 게 있다, 행동 조심해라'는 말을 들은 박부장은
곧바로 누가 자신을 고자질했는지 색출해 내겠다며
밀정이라도 잡아내듯 한 명씩 불러 취조하기 시작했다.
신뢰를 저버리는 놈이 가장 나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김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박부장같은 사람 입에서 신뢰라는 단어가 나올 줄이야.

어찌 보면 운이 좋은 사람이다.
보통 부장급이면 투입 한 달 내에 역량을 평가받는다.
그런데 팀장은 6개월이 넘게 그에게 수습 기간을 부여하고 있으며,
부장은 후임들한테 업무를 떠넘기며 꾸역꾸역 버티고 있다.
세상에 이런 꿀보직이 또 어디 있는지?
그를 만난 이후로 김과장의 꿈은 로또 1등이 아닌 박부장으로 바뀌었다.

"차장님,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 나도 동감이야."

평소 회식을 기피하는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실무자는 그날 퇴근 후 회사 인근 포장마차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름한 가게 한켠에서는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기를 바라는 직장인들의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소주잔을 사이에 두고 간단히 몇 가지 요리를 시켰지만
주된 안주는 역시 박부장이었다.

"일은 안 하고, 위에선 그냥 내버려 두고... 이러다 저희 다 망가져요.”
“팀장도 사실 알지. 근데 일단 조용히 가고 싶은 거야. 자기 진급도 걸려 있으니까.”
“결국 실무자만 희생하는 거 아닌가요? 대체 언제까지 버텨야 됩니까”

평소 술을 거의 안 먹는 김과장이었지만
이 날 만큼은 분 단위로 잔을 비우고 채우길 반복했다.

“차장님, 진짜 이거 이렇게 참고 있으면 안 돼요. 뭔가라도 시작해야 돼요.”
"그래, 내가 일단 팀장이나 다른 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면서 슬슬 운 띄워볼게."
"저도 내부 여론을 포섭해 볼게요."
"그래, 당장에 뭘 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 훗날을 도모해 보자. 팀장 귀에 들어갈 정도로 너무 티 내진 마라."
"당장 떠나지 않는 이상 저도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역 아닙니까"


방금 나온 계란말이에 젓가락을 가져가던 김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맞은편에 앉은 이차장도 어이가 없긴 매한가지였다.

기껏해야 월 몇백 따리 개미목숨인 직장인주제에 이렇게까지 비장하게 사회생활을 할 일인가.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하며 살아남은 회사에서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말 아끼며 살아온 두 직장인이
기꺼이 한 배를 타기로 한 순간이었다.

비록 침몰하더라도, 손도 못써본 채 계속 당할 수만은 없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대의를 확인한 두 회사원은
술 한잔에 도원결의를 맺고
을지로의 낡은 밤거리를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자신들의 발버둥이 성공하길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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