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할 수 있어! 하지만 왜 잘되게 빌어주는 마음은 내키지 않는 걸까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뒤로하고 서울로 유학 간 것도 모자라 미국 유학까지 간 난년이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 항상 돈 없다 돈 없다를 입에 달고 사는 어머니와 처자식은 나 몰라라 하고 본인부모 형제 챙기기 버거웠던 아버지. 그런 가난한 우리 집에서 어떻게 어떻게 미국유학을 하고 지금은 미국 대기업에 다니며 아주 잘 나간다.
미국에서 좋은 남자 만나 아들, 딸 잘 낳고 집도 사고 승진도 하고 아주 잘 산다.
팍팍한 삶 속에서 카톡으로 전해져 오는 여동생의 아주 미국스런 사진들이 묘하게 내 심기를 거슬리게 하였다.
너무 이쁜 파란 눈의 조카들 그리고 멋진 남편 그리고 으리으리한 대저택까지...
시기 질투라고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여동생에게 느낀 감정은 바로 시기, 질투다. 부인할 수 없다.
왜일까? 왜 내 동생인데 시기질투를 할까? 이런 내가 싫었다.
정말 이런 언니가 바로 나라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며칠 전부터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살고 있지 못했다.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언니에게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지옥과도 같은 하루하루를 간신히 간신히 몇 년 동안 버텨내고 있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냉혈한 같은 동생이 완전히 무너져서 담담하게 말하는데
내가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나의 시기질투가 이런 일을 만들었나?라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한겨울에 10킬로미터를 달리며 동생의 행복을 빌기도 하고
밤잠을 설치며 이런저런 조언을 카톡에 보내보기도 하고
이른 시간 사무실에 출근해서 동생을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왜 위로는 쉽지만 축하는 어려울까?
누군가를 잘되게 하는 마음은 왜 좀처럼 내키지 않는 걸까?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실패에서 묘하게 기쁨을 느끼는 감정을 샤덴프로이트라고 한다.
종종 타인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여동생은 완벽한 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빨리 내가 시기질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년아! 빨리 내가 시기, 질투할 수 있도록 잘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