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변신. 시골의사'를 읽고
책이든, 영화든, 특정 장소든 간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마주하게 되느냐는 엄청 중요한 일인 것 같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첫 번째 책이었던 '변신 이야기 1' 리뷰에서 밝혔든, 세계문학전집을 순서대로 읽고 글을 쓰려는 시도는 이번이 두 번째이다. 그런데 다시 읽게 된 '변신. 시골의사'는 '햄릿'만큼이나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카프카의 글은 여전히 난해한 부분이 있긴 해도 과거에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와닿는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그게 오히려 내게 독이 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가족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 '출구', '(불명확하지만 아마도) 자살'과 같은 요소가 나를 자극했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도 나는 이미 그것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왜 두 시기의 감상이 다를까? 그것은 아마도 과거의 내가 늪에 빠져 침잠하고 있을 때,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홀로 걷고 있을 때 이 책을 만났기 때문이리라. 자신의 고통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었으니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괴롭다는 감정에서 한 발짝 벗어나 상황을 바라볼 수 있기에, 똑같은 글도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변신. 시골의사'에는 카프카의 중단편 소설 32편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 그 어디쯤인가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다. 단편임에도, 아니 어쩌면 단편이라서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은데, 이게 카프카 본연의 문체(줄 바꿈이 적고, 한 사람의 복잡한 의식 세계를 마구마구 풀어놓은 듯한 형태) 때문인지, 아니면 번역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외국 독자의 한계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의 소설들은 더 천천히, 더 집중해서, 더 꼭꼭 씹어먹고 싶어지는 욕심이 나는 글이었다. '변신', '판결', '학술원에의 보고', '굴'은 특히 더 깊게 빠져들었던 작품들인데, 가족에 대한 애증,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에 대한 갈망, 외부와 내면세계 사이의 불안 등이 카프카의 언어로 그려지고 있다.
'변신'에서 말하는 변신은 일차적으로는 주인공 그레고르가 흉측한 해충으로 변한 것을 말하겠지만, 사실 혼자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는 그레고르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몸이 변한 후에도 회사에 출근하려 했고, 가족을 먹여 살릴 걱정을 했으며, 여전히 누이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사랑하고 그 음악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외부 형태는 그대로일지라도, 실제로 변한 것은 나머지 가족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빚을 갚거나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그레고르를 끔찍하고 귀찮은 존재로 여겼으니까. 그의 죽음을 알았을 때, 속 시원하게 셋이서 집을 떠날 만큼.
p.73 그가 없어져 버려야 한다는 데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의 그것보다 한결 더 단호했다.
이 문장부터 그레고르의 마지막 숨이 멎을 때까지 나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레고르의 등에 박힌 썩은 사과나 온통 부드러운 먼지로 덮인 곪은 언저리가 아니라, 그를 내보내야 한다고 외치던 '가족들의 배척과 증오'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를 없애고 싶은 그레고르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이해했기에, 내 눈은 고작 몇 줄의 짧은 문장들 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p.34 이제는 분명 아침까지 아무도 더 이상 그레고르에게로 들어오지 않을 테니 그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새로이 꾸려가야 할 것인가를 방해받지 않고 생각해 볼 긴 시간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흉측한 해충'으로 변신하기 전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결국 스스로를 없애는 선택을 하기 전에, 꼭, 반드시, 나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보자.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쫓아오지 않는, 나만의 '굴'에서. 안전하고 고요하게. 하지만 그 사유의 끝은 '타협'이라는 울타리 안이 아닌, '완전한 자유'로 향하는 출구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