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 5월 5일쯤, 여름을 맞이하여 빠른 성장을 시작하는 시기
열매채소 모종 아주 심기, 잎채소 솎아 먹기, 감자 북주기, 잡초 제거하기, 병충해 방제하기
입하라니. 벌써 여름의 절기가 다가왔다. 아직 한참 추운 2월 초에 첫 절기인 입춘이 시작되니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계절보다 절기의 계절이 늘 앞서기는 하지만 그래도 입하라니. 벌써 한 계절을 지나 보냈다는 사실에 괜스레 아쉬운 마음도 든다. 그래도 텅 비어 허전했던 지난 밭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제 제법 꽃도 잎도 많이 피워서 밭을 채워가는 모습에 뿌듯하기도 하다.
모든 작물은 심는 시기도 중요하다. 특히나 아무 보호막이 없는 노지에 심을 때는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와 늦서리 등의 날씨 변화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언제 아주 심기(씨앗이나 모종을 정한 밭 자리에 옮겨 심는 것)를 해야 할지 늘 날씨 눈치를 본다. 아직 초보 농부인 나는 매번 농사 정보를 찾아봐야 하는데 토마토, 가지, 고추와 같은 열매채소들을 언제 심어야 할지 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할 당시 아주 정확하고 명쾌한 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쯤에 심으세요."
그때는 절기에 대해 잘 몰라서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얘기하셨던 어린이날이 입하를 얘기하는 거였다. 엄마는 그때 같이 계셨던 것도 아닌데 그 시기를 어떻게 알고 맞추시는지 밭에 가는 길에 농협에 들러 가자시더니 한쪽 모종 가게로 가셨다. 모종 가게에는 우리처럼 여러 열매채소의 모종을 사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튼튼하고 싱그럽게 자라난 모종들을 보고 있으니 예쁘다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우리도 고추와 수박 모종을 사서 돌아왔다. 이미 한 계절이 훌쩍 지났지만 이제 비로소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하는 기분이다.
열매채소를 심는 것 외에 요즘 가장 바쁜 일은 두릅을 따러 다니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두릅은 두릅나무의 새 순으로, 조금 오래 두면 금방 억센 가시가 나고 쇠어 버리기 때문에 부지런히 따줘야 한다. 가지 가장 끝에서 솟아 난 순을 따 먹고 나면 뒤늦게 나온 곁순을 또 따서 먹는다. 이런 식으로 한참을 수확해 먹을 수 있지만 먼저 나온 순이 가장 연하고 맛있다. 장사를 하는 집 같았으면 이런 최상품은 파느라 못 먹고 나중에 수확한 파치들이나 조금 먹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가장 좋은 걸 가족들이 실컷 맛있게 나눠 먹는다. 맛있는 걸 나부터 먹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원래 밭 한쪽에 있던 두릅나무가 무섭게 뿌리를 뻗어 번식했다. 문제는 울타리 안쪽이 아니라 울타리 바깥쪽으로 번진 것이었다. 하필 그쪽이 이따금씩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라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
작년 이맘때쯤, 결혼해서 분가 한 동생이 제부와 함께 밭에 놀러 오기로 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딸과 사위가 온다니 아빠는 신이 나서 '내일 저 두릅 따서 먹여야지.'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큰 바구니를 들고 사위에게 따라오라며 두릅나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셨다. 두릅이 어떻게 생기는지, 어떻게 수확하는지까지 보여주고 싶으셨던 거였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가셨던 아빠는 빈 손으로 돌아오셨다. 밤 사이 누군가가 이미 잘 자란 두릅은 다 따간 후였다. 사위에게 "이게 두릅이야." 하고 보여주고 싶으셨던 아빠는 누군가 전부 훔쳐 갔다며 매우 속상해하셨다. 다행히 먼저 따 둔 두릅이 있었기에 동생 부부도 그 맛을 볼 수 있었지만 막 따서 가장 신선한 걸 먹이지 못한 속상한 기분은 계속 마음에 남았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결심을 하셨는지 올해 두릅 철이 다가오자 아빠는 바로 팻말부터 만들어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주변에 무엇이든 뚝딱뚝딱 만드시는 분께 부탁하여 두 개의 팻말을 만들어 오셨다. 두릅 훔쳐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팻말이 필요하다 하셨더니 이미 문구까지 적어 주셨다.
두릅나물 꺾어 가지 마시요. -주인백-
비록 여기저기 맞춤법이 틀린 팻말이지만(심지어 "두룹나물"이라고 쓰셔서 ㅜ에서 짧은 기둥을 긁어 ㅡ로 만들었다.) 효과는 있는지 올해는 어느 하나도 도둑맞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잘 수확해 먹었다.
이쯤이면 궁금하다. 사람들은 두릅이 맛있어서 좋아하는 것일까? 비싸서 좋아하는 것일까? 울타리 안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조금만 생각하면 바깥쪽 두릅에도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 텐데 모른 척 전부 따갈 만큼 욕심나게 하는 이유가 뭘까? 꼭 훔쳐간 사람만이 아니라 주변에 두릅을 선물할 때도 하나같이 "어유, 이 귀한 것을!" 한다. 맛있는 걸로 치면 다른 채소들도 맛있는데 반응이 다른 걸 보면 확실히 비싸서 좋아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두릅은 왜 다른 채소들보다 비쌀까? 그 이유는 몇 번의 두릅 수확을 쫓아다니면서 깨달았다.
엄마가 "두릅 따러 가자." 하면 챙기는 장비들이 있다. 일단 수확한 두릅을 담을 큰 바구니, 무시무시한 가시로부터 손을 보호해 줄 두꺼운 장갑, 그리고 긴 장대 끝에 호미날을 박아 넣은 새로운 형태의 기구가 그들이다. 일 년 동안 키가 쑥 자란 두릅나무는 우리 키를 훨씬 넘는데 그 끝에 달린 순을 따려면 가지를 끌어당길 도구가 필요한 것이다. 심지어 가지마다 엄청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가 있어서 두꺼운 장갑을 끼고도 찔리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찔릴 때 잠깐 따끔하고 마는 게 아니라 한동안 그 자리가 욱신욱신할 정도니 나는 한 번 찔린 이후로 겁이 나서 엄마 뒤를 쫓아다니며 주워 담는 일만 하고 있다. 그렇게 던져주는 순을 주워 담기만 하는데도 그 순에 있는 가시에 찔려 아프다고 징징대는 게 문제지만. 그래, 모르긴 몰라도 두릅은 수확하는 데 위험수당이 붙어서 비쌀 것이다.
흔히들 아는 두릅은 이렇게 나무 가지에서 자라는 새순이지만 땅에서 자라는 두릅도 있다. 그래서 나무에서 나는 두릅을 참두릅, 땅에서 나는 땅두릅을 땅두릅이라고 부른다. 땅두릅은 참두릅과 그 모양도 비슷한데 다만 좀 질기고 향이 덜해서 참두릅만큼 귀한 취급을 못 받는다.
참두릅은 손으로 잡고 꺾으면 꺾이지만 땅두릅은 그렇지 않아서 칼로 잘라줘야 한다. 흙으로 덮여 있는 하얀 부분이 연하고 맛있기 때문에 최대한 길게 남길 수 있도록 칼을 땅 속 깊이 찔러 넣는다.
땅두릅에는 특유의 미끌미끌한 점액이 있다. 워낙에 흐물거리고 미끌거리는 식감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는 역시 땅두릅보다 참두릅을 선호한다. 그래도 내가 참두릅보다 땅두릅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꽃이다. 마치 불꽃놀이 하듯이 가운데서부터 바깥쪽을 향해 팡팡 터진다. 이런 작은 불꽃놀이 축제가 열리고 있는 꽃을 발견하고 일단 사진부터 찍었다. 그리고 후에 엄마에게 이게 무슨 꽃인지 물었더니 땅두릅 꽃이라고 했다. 꽃이 지고 난 자리에 까맣게 열린 열매도 귀여웠다. 이 열매가 떨어지고 나면 또 그 자리에서 새 순을 틔우겠지. 열매와 씨앗이 감추고 있는 생명력을 생각하면 이 작은 동그라미가 벌써부터 기특하게 느껴진다.
정확하게 말하면 땅두릅의 꽃과 열매가 예쁘고 귀여워서 좋아했는데 이제야 문득 '그럼 참두릅은 꽃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찾아봤더니 없긴 왜 없어. 두릅나무에도 꽃이 아주 흐드러지게 핀다. 다만 내가 잘 못 보는 저 높은 나무 위에서 피는 것과 딱 내 눈에 띄기 좋은 높이에서 자라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존재하던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정말 인생의 진리구나. 이제라도 알았으니 올해는 두릅나무의 꽃도 잘 관찰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