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 7월 22일쯤, 큰 더위가 찾아오고 뜨거운 햇볕 아래 작물이 자라는 때
가을 당근 파종하기, 열매채소 수확하기, 옥수수 수확하기
하늘이 맑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친다. 매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걸 보니 장마가 끝났나 보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내 흐리고 비가 쏟아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올해의 장마는 예년보다 일찍 시작해서 걱정하게 하더니 비가 안 와서 걱정이다가 이번에는 또 너무 한 번에 와서 걱정하게 했다. 늘 "적당히"가 중요한데 이번 비는 어째 중간이 없다. 우리 밭이 있는 곳은 집중호우가 내리지도 않았고,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 덕분인지 농작물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이걸 다행이라고 얘기해도 될까. 뉴스를 통해 다른 지역의 소식을 듣고 있자면 마치 내 일처럼 속이 상한다. 부디 큰 탈 없으시기를, 이미 피해를 보신 분들에게는 하루빨리 피해 복구가 이루어 지기를 바라본다.
쓰다 보니 매번 날씨 얘기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쩌겠어. 농사짓는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게 날씨인데. 지구야, 사랑한다. 내가 더 잘할게.
연재를 시작하던 때를 떠올리면 수확하는 작물이 없어 어떤 채소에 대해 써야 할까를 엄청 고민했었다. 뭐든 딱 맞춰 시작하고 끝내기 좋아하는 내가 결국 입춘과 우수를 건너뛰고 경칩에서야 시작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 시기에 수확하는 채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또 한 번에 너무 많은 작물들을 수확하고 있어 뭐부터 써야 하나 고민하게 한다. 가지, 오이, 토마토, 고추, 바질, 옥수수에 상추, 쑥갓, 깻잎 등등. 먹기도 바쁜 계절이 돌아왔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대서의 채소로 무엇을 골라야 하나. 다른 채소들은 이제 막 수확이 시작되었으니 아직 얘기할 기회가 더 있다. 나머지 채소들이 크는 이야기는 나중에 써야지, 하고 미뤄뒀다. (이렇게 미루다 결국 이야기 못하고 지나가는 채소들이 있겠지.) 그래서 이번에는 이미 한 차례 수확을 마친 당근 얘기를 해보기로 했다.
한 차례 수확을 마쳤다는 이야기는 다음 수확이 또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근은 곤드레나 공심채 같이 한 번 심어둔 채로 1차 수확을 하고 곁순을 또 수확하는 게 아니라 아예 파종을 두 번 한다. 뿌리채소들은 그야말로 뿌리까지 몽땅 뽑아 수확하니 2차 수확을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보통 봄에 씨앗을 뿌려 여름에 수확하고, 다시 여름에 파종하여 가을에 수확한다. 우리 가족은 매일 아침 식사로 당근을 넣은 웜 샐러드를 먹기 때문에 소비량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1년에 두 번 심고, 두 번 수확하는 편이지만 한 번만 심고 수확한다면 보통 여름에 심고 가을에 수확하는 것을 선택한다. 가을에 수확하는 당근이 더 달고 맛있기 때문이다.
4월 초, 마지막으로 냉이를 캐는 날 당근 씨앗도 뿌렸다. 당근과 같은 뿌리채소들은 한 곳에서 잘 자리 잡고 커야 곧고 굵게 자라기 때문에 옮겨 심지 않고 씨앗 상태에서 밭에 바로 심는다. 우리 밭에서 키우는 무, 순무, 비트와 같은 다른 뿌리채소들도 모두 같은 방법으로 직파(밭에 직접 씨를 뿌리는 것)를 한다. 하우스에서 싹을 틔운 모종을 밭에 옮겨 심을 때마다 이 작고 어린 생명이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하는데 심지어 이렇게 직파하는 채소들은 그곳에서 싹을 틔워야 한다. 과연 이 작은 씨앗이 해낼 수 있을까? 그러나 보란 듯이 싹을 내어주는 식물들을 보면 이런 걱정은 나만 하는 것 같다. 쓸데없는 걱정 만들어서 하기 1등인 나에게 제발 그냥 살라고 이렇게 몇 번이나 힌트를 주는데 나는 왜 여전히 걱정 덩어리로 살고 있을까.
엄마는 매번 여기저기서 농사 지식을 얻지만 가끔은 뛰어난 도전 정신으로 냅다 실험해보기도 한다. 매년 여리고 맛있는 당근의 어린잎을 다 잘라먹는 달팽이들이 골칫덩어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는 꾀를 내었다. 점액질을 끌고 매끈한 곳을 다니는 달팽이들이 곱고 건조한 가루가 있는 곳은 못 오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천연 비료를 만들기 위해 모아 두었던 달걀 껍데기를 곱게 갈고 여린 잎 주변으로 빙 둘러 뿌려주었다. 그리고 결과는 놀라웠다. 정말 달팽이로 인한 피해가 없었다. 물론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 그저 우연이었는지는 몇 해 더 실험해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올해 당근을 지켜낸 사실만으로도 기쁘다.
직파를 할 때는 씨앗이 발아하지 않거나 다른 장해로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한다. 한 구멍에 씨앗을 3~4개씩 넣어 여유분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구멍에서는 2개만 발아해서 자라고, 어느 구멍에서는 전부 발아했다가도 달팽이의 식사로 인해 사라지기도 한다. 만약 모든 씨앗이 다 발아하고 잘 자라면 좋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뿌리를 곧고 굵게 뻗을 자리가 충분히 있어야 하는데 여럿이 모여 자라면 그 자리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물론 흙 속의 영양분도 나눠 가져야 하니 잘 크기가 어렵다. 그래서 3~4개의 씨앗이 모두 발아하고 잘 자라난 구멍에서는 그중 건강하고 튼튼한 줄기를 2개씩만 남기고 나머지는 뿌리째 뽑아 준다. 골고루 못 자라는 것보다 몇 개가 잘 자라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뿌리를 뽑을 때 가까이 있는 건강한 줄기의 뿌리도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솎아줄 때(이렇게 몇 개만 잘 자라도록 영양을 몰빵 해주는 것) 약한 줄기의 뿌리를 뽑는 것보다는 흙 속으로 가위를 넣어 뿌리를 잘라내는 게 더 안전하다고 한다. 앞으로 다른 작물들을 솎아 줄 땐 옆에 작물들이 다치지 않도록 이렇게 잘라줘야지.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흙 위로 붉은 당근 머리가 빼꼼 보이기 시작하면 신이 나서 그때부터 수확하는 날만 기다린다. 땅 속에서 자라는 당근은 이만큼 크기까지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므로 익숙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당장이라도 먹을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당연히 이런 마음으로 성급하게 수확하면 아주 작고 가는 당근을 만나게 된다. 잘 참고 기다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별로 힘든 일도 아닌 게 밭에는 이것 말고도 신경 쓸 일이 아주 많다. 다른 어린 채소들이 크기를 도와주고 있으면 어느새 당근도 쑥 자라난다.
당근의 잎이 부쩍 자라서 땅을 향해 늘어지고 그 잎이 땅에 닿으면 드디어 수확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다. 이 때도 수확하는 날짜의 선정이 중요하다. 비가 많이 와서 흙이 젖은 상태에서 수확하면 저장성이 떨어지므로 맑은 날이 며칠 계속되기를 기다렸다가 땅이 마르면 수확한다. 다만 그 시기가 너무 늦어지면 표면이 거칠어지고 갈라지므로 잘 살펴서 결정해야 한다. 농사는 늘 날씨와의 눈치 싸움이다.
처음 당근을 수확할 때는 이걸 어떻게 다 파내고 뽑아낼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걱정과 다르게 막상 뽑아보니 잘 잡고 올리면 쏙쏙 뽑혀 나왔다. 지난 몇 년간 엄마가 심고 수확해 온 당근을 봤을 때 잔뿌리가 많고 울퉁불퉁 못생겨서 우리 밭에서 당근은 잘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올해의 당근은 어쩜 이렇게 곧고 예쁜지. 이번 당근 농사가 성공적이라는 생각에 수확하면서도 신이 났다. 그렇게 뽑아낸 당근들을 한쪽으로 착착 쌓아두면서 지나오고 나니 뒤를 돌아봤을 때 일렬로 예쁘게 줄 지어 있었다. 원래 당근이 이렇게 예쁜 거였나?
열심히 당근을 뽑고 있을 때 갑자기 "어?" 하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엄마의 손에 신기한 당근이 들려 있었다. 우리가 흔히 보고 먹는 주황 당근이 아니라 노란색의 당근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된 일이지? 크는 중에 변이가 왔나? 혼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간단하게 답을 주었다.
"씨앗이 하나 섞여 들어갔나 보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노란 당근이 갑자기 우리 밭에 제 발로 찾아와 주었다. 맛이 다른가? 파프리카는 색이 다르면 주요 성분도 다르고 우리 몸에서 작용하는 것도 다르던데 이것도 뭔가 다를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온 뜻밖의 만남에 궁금증이 마구 샘솟았다.
며칠 후 혼자 아침을 먹다가 노랗고 단단한 채소를 보며 이게 뭔가 한참을 고민했다. 감자인가? 감자면 이렇게 단단할 리가 없는데. 호박인가? 호박이어도 그렇고. 열매마를 자르면 이런 모양이었던 거 같은데. 어쩐지 먹어봐도 뭔지 모르겠다. 나 말고 모두 짐작했겠지만 그 노란 채소는 그날 수확한 노란 당근이었다. 어쩜 당근만 빼고 다 떠올린 건지. 나중에서야 엄마한테 그게 뭐였는지 물었더니 엄마가 "당근!" 하고 답해주어서 알았다. 수확할 땐 그렇게 궁금해하더니 왜 먹을 땐 전혀 생각을 못했을까. 처음 만났을 땐 그렇게 애지중지하더니 며칠 지났다고 홀랑 까먹은 내가 너무 어이없어 웃었다.
다양한 작물을 심고 수확할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이야기들에 놀라고는 한다. 몇 년의 농사를 지켜보며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매번 다를까.
절기마다 키우고 요리하는 이야기를 각각 2개씩 담다 보니 24 절기 중 몇 개를 제외해도 40개가 넘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여름의 마지막 절기인 대서까지를 전반전으로 마무리하고, 가을의 첫 절기인 입추부터는 후반전으로 넘기기로 했다. 모든 게 처음이라 하루하루 얼떨떨하게 보내고 있지만 이제 돌아보니 나의 올해 농사도, 이 이야기들도 이제 딱 반 왔다. 부디 후반전도 지금처럼만 즐거울 수 있기를. 사실 든든한 스승님인 엄마가 있어 걱정이 없다.
(+)
밭에서 찍은 사진들로 휴대폰 케이스를 만들었어요. 매번 새로운 작물을 키우고 수확할 때마다 우리가 먹는 채소가 마트 매대 위 모습으로만 기억되는 게 아쉬웠거든요. 사실 우리가 먹는 부분은 모두 잎과 꽃이 있어야 잘 자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요.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분들께도 그 잎과 꽃들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들었습니다. 땅콩, 감자, 쑥갓 세 종류와 채소는 아니지만 밭에 핀 능소화와 샤스타데이지를 담은 제품들이 올라가 있습니다. 앞으로 점차 시리즈를 늘려 보도록 할게요.
링크는 여기! 초록의 헤아림 마플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