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 8월 7일쯤, 가을의 기운이 일어는 때
참깨와 고추 수확하기, 가을 감자 파종하기, 김장용 배추와 무 파종하기
봄과 여름 편을 끝내고 가을과 겨울 편으로 넘어왔다. 한해를 기록해 보고자 마음먹고 시작했으니 겨울까지 모두 기록해 두고야 끝날 일이지만 벌써 반을 지나왔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매주 하나씩 글을 써서 올린다니!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역시 나는 마감의 압박이 있어야 움직이는 사람이었던가. 쌓여가는 글들을 보며 뿌듯하기는 하지만 세이브 원고를 만들어 둘 수도 없는 실시간 연재는 매번 쫓기는 기분이라 조금 숨이 차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절기에 맞춰 가기 위해 일부러 한 주를 쉰 것 외에 한 번도 늦거나 거른 적이 없으니 스스로를 칭찬하며 끝까지 힘내보자 다독여본다.
입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지만 날짜상으로는 아직 입추 전이라 그런가 가을의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기록적인 폭염이라고 하니 올여름 더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더위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고 싶지만 현실은 이런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는다. 호미 씻기(여름 농사 내내 쓰던 호미를 씻어 말려두고 수확을 기다리며 잔치를 여는 일)를 하며 한가롭게 수확을 기다리는 것이 입추라고 하는데 올해는 말라가는 작물들에 물을 대느라 매일이 바쁘다. 아직 입추가 안 와서 그런 거라 위안 삼으며 입추 매직을 기다려봐야지.
우리가 "오이"하면 떠올리는 가늘고 긴 초록 오이와 굵고 큰 노란 오이(노각)는 같은 종일까? 다른 종일까? 풀수저답게 어릴 때부터 식물 교육(!)을 받아 온 나는 예전부터 이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야, 너희 오이를 오래 두면 늙은 오이 되는 거 알아?"
괜히 으스대며 말하면 친구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듯 놀라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사실 뻥이야!" 하고 장난을 쳐서 무엇이 진실인지 헷갈려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너무 다르기도 한 두 작물 덕에 그런 장난이 가능했다. 그때는 장난으로 거짓말이라 했지만 이제 이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한 게 되었다.
농업은 날로 발전하고 그에 따라 매일같이 새로운 품종도 개발된다. 그러면서 오이의 품종도 다양해졌다. 지금 우리 밭에서만 해도 일반적인 초록 오이와 앙증맞은 미니 오이, 그리고 늙은 오이까지 다 다른 3종의 오이가 자라고 있다. 즉, 오이와 늙은 오이는 다른 품종이 된 것이다.
원래는 우리도 오이 1종만 키우다 그 오이를 오래 두어 늙은 오이로 먹었는데 몇 년 전부터 노각을 따로 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도 의아했다. 그냥 오이 하나 심어서 늙도록 두면 늙은 오이가 되는데 왜 굳이 "늙은 오이"라고 판매하는 종을 따로 심어 키울까. 늙은 오이라고 이름이 붙은 건 뭐가 다른 걸까. 농사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답해 주는 챗맘피티(aka. 엄마)에게 물었더니 일반 오이를 늙게 두어서 수확한 것보다 노각이라고 심은 오이가 훨씬 크고 살이 많다고 했다.
애호박도 늙도록 두면 늙은 호박이 되고, 늙은 호박도 늙기 전에 먹으면 애호박처럼 먹을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먹는 것이 맛이 덜해 애호박으로 먹는 품종과 늙은 호박으로 먹는 품종을 따로 취급한다고 한다. 아, 호박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오이도 그렇게 나뉘었구나.
그중에서도 노각은 늘 씨앗부터 파종하고, 애오이는 매년 모종으로 사서 심는다. 어떤 기준으로 나뉘는 걸까. 역시나 엄마에게 물으니 애오이의 모종은 시기가 되면 아무 데서나 나와 있어 지나가다가도 쉽게 살 수 있지만 노각 모종을 파는 곳은 많지 않아 따로 주문하지 않으면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뭔가 매우 현실적인 이유였다.
원래 오래 보면 더 정이 들게 마련이라 씨앗부터 심어서 떡잎 나오기를 기다리고, 그 모종을 밭으로 옮겨 심은 노각과 모종부터 사다 심은 오이 사이에 애정도의 차이가 생기고 말았다. 내가 무엇을 더 맛있게 잘 먹냐에 따른 것보다 순전히 오래 키우고 관찰했다는 이유에서 생긴 애정이다. 모종부터 키운 건 다 커서 온 거라 내가 키운 거 같지 않달까. 덕분에 내 사진첩에는 일반 오이의 사진은 몇 없고, 노각 오이의 성장 사진만 가득해졌다.
보통 오이는 지지대를 세워주고 위로 올려 키우지만 노각은 넓은 곳에 심어 바닥을 기며 크도록 두었다. 지지대에 묶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버티는 애오이와 달리, 노각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지지대만으로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키우면 더 안정적으로 자라고, 크고 굵게 자라는 열매에도 부러질까 하는 걱정이 없지만 위로 올려 키우는 것보다 훨씬 넓은 땅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엄마도 노각에게 훨씬 큰 땅을 내어주는 걸 보니 노각을 편애하는 건 나뿐이 아닌가 보다.
어떤 작물은 수확함으로써 모든 농사가 끝나지만 일부는 채종까지 마쳐야 끝이 난다. 잘 여문 건강한 씨앗을 수확하려면 평소 우리가 먹는 열매보다 더 많이, 오래 익도록 두어야 한다. 씨앗이 연할 때 수확하는 채소가 맛이 좋지만 심기 위한 씨앗은 과육이 다 마르거나 삭은 후에야 단단해진다.
내년에 심을 노각의 씨앗을 수확하기 위해 초반에 열린 노각 몇 개를 수확하지 않고 늙도록 두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잘 컸다며 따려고 했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엄마가 급히 말렸다. 늙은 오이는 늙어야 수확하는 오이인데 그 오이를 더 늙도록 두다니. 이 오이는 얼마나 더 늙어야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 걸까. 괜히 오이에 감정이입하고 슬퍼지는 건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겠지. (차마 내 손으로 "나도 이제 늙어서겠지."라고는 못 쓰겠다.)
지금까지 내내 노각 얘기만 했으니 노각을 향한 내 편애가 이렇게 또 드러난다. 그런데 사실 노각으로 할 수 있는 요리는 한정적이고, 애오이로 할 수 있는 요리가 훨씬 많아서 더 자주 다양한 방식으로 먹고 있는 건 애오이 쪽이긴 하다. 잘 열린 모습도, 수확하는 모습도 찍어두지 않은 걸 보니 그냥 너무 일상처럼 수확하고 먹어왔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노각은 각 잡고 수확하러 이랑 사이를 누비며 찾아다녀야 하는데 애오이는 그냥 오가다 잘 익은 게 보이면 하나둘씩 툭툭 따서 가져온다. 원래 일상에 더 자연스럽게 스며들수록 고마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법이다.
수확시기가 되면 한 번에 싹 수확하는 작물이 있는가 하면 오이는 여름 내내 조금씩 수확하는 작물이다. 한 번에 수확하면 그때 한 번 먹고 나머지는 저장하는 게 대부분인데 오이는 조금씩 자주 나오니 오히려 다양한 방법으로 즐기게 된다. 떨어질세라 계속 만들어서 쟁여두고 먹는 차지키 소스(우리 집에서 만드는 스타일은 소스라고 부르기 애매하긴 한데)와 금방 뚝딱 상큼한 간장국수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오이장아찌, 시원한 콩국수와 함께 먹기 위해 만들어 둔 오이소박이, 더위로 입맛 없을 때 밥 위에 얹어 비벼 먹기 최고인 노각무침에 오이냉국까지. 이 더운 여름에 상큼하고 시원한 오이만큼 좋은 식재료가 없으니 온갖 여름 음식들을 다 해 먹는 중이다. 그래서 오히려 고민이 깊어졌다. 우리가 해 먹는 오이 요리가 이렇게나 많은데 다음 주에 어떤 요리를 소개해야 하는 걸까? (원하시는 거 댓글로 추천받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