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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의 맛, 노각(늙은 오이) 무침

by 헤아림


계속 고민이 많았다. 먼저도 얘기한 것처럼 오이는 여름 내내 수확하며 먹는 채소이다 보니 한 철 잠깐 맛있는 요리 해 먹고 보내는 채소들과 다르다. 무쳐 먹고 볶아 먹고 섞어 먹고 이리저리 여러 방법으로 한 계절을 온전히 즐기다 보니 우리 가족이 가진 레시피만 해도 엄청 다양해졌다. 어제 동생에게 가져다 줄 반찬들을 챙기던 엄마가 "다 오이네!" 하며 웃으실 정도였다. 그제야 엄마가 담아 놓은 반찬들을 보니 오이지무침, 오이장아찌, 오이소박이, 노각 무침이 있었다. 이 중에 차지키(여전히 이거를 소스라고 부르기 어색해 자꾸 "차지키"라고만 부르게 된다.)가 빠진 이유는 그저 지난주에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이 많은 오이 요리 중 마지막까지 두고 고민했던 건 노각 무침과 차지키였다.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은 노각 무침 레시피를 해야 할지, 여름 내내 만들어서 먹고 있는 차지키 레시피를 해야 할지. 결국 인스타그램에 올려 친구들에게 투표를 해달라고 했다. 결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노각 무침이 이겼다. (그래서 차지키 레시피는 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로 했다. 헤아림 인스타그램)




노각 무침으로 외할아버지를 기억하는 건 이 음식 자체를 외할아버지한테 배웠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돌아가시기 전, 식사가 가능했던 때까지 할아버지가 드시던 음식이 노각 무침뿐이었으니 그렇게 기억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오래 당뇨를 앓아 오신 할아버지는 혈당 조절을 위해 늘 식단을 관리하셨다. 오랜만에 만난 손자들을 위해 차린 음식이 눈앞에 한 상 가득 있어도 할아버지의 식사는 늘 노각 무침에 밥을 비벼 드시는 것으로 끝났다. 어린 눈으로 저게 뭔데 할아버지는 매일 저것만 드실까 싶었다. 다른 음식을 드시고 싶어도 못 드시고 계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가 늘 드시던 음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신 음식이 노각 무침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속이 느끼하거나 입맛이 없을 때 밥을 데우고 그 위에 노각 무침을 얹어 비벼 먹는다. 매콤하고 새콤하고 시원한 덕에 속이 개운해진다. 그리고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먹을 때마다 외할아버지를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5년 5월 7일에 돌아가셨으니까...'하고 생각하니 어느새 딱 20년이 흘러 있었다. 내가 무언가 끊임없이 만들고 손을 움직이는 사람으로 자라난 건 외가댁에 갈 때마다 옆에 앉혀 두고 그림을 그리고 종이접기를 해주시던 외할아버지 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할아버지를 못 본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니. 매년 여름 노각 무침을 먹을 때마다 할아버지를 떠올렸더니 20년이 지난 줄도 모르고 살았다. 새삼스레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다짐해 본다.


'저도 할아버지처럼 늘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살아갈게요.'



재료


- 노각 1개 (약 1400g)
- 굵은소금 2T
- 실파 4개
- 마늘 3개
- 초고추장 3T
- 고춧가루 2t
- 식초 1t
- 매실청 1T
- 참기름 1t
- 통깨




만들기


1. 감자칼을 이용하여 껍질을 깎고 세로로 길게 반 자른다.
2. 속을 파고 약 7~8mm 두께의 반달 모양으로 자른다.
3. 소금을 넣고 중간중간 뒤적여가며 30분 정도 절인다.
4. 물에 한 번 헹군 뒤 면보에 넣어 물을 꼭 짠다.
5. 볼에 절인 노각과 송송 썬 파, 다진 마늘, 그리고 분량의 양념을 넣고 버무린다.
6. 그릇에 옮겨 담고 통깨를 뿌린다.




Tip


1. 만들어 두고 먹는 동안에도 물이 계속 생기니 절인 오이를 짤 때 최대한 물을 꼭 짠다.
2. 버무릴 때 처음에는 좀 허옇게 느껴질 수 있으나 버무릴수록 고춧가루가 불어 색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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