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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의 채소, 토마토

by 헤아림




처서


양력 8월 22일쯤, 더위가 물러가고 찾아온 가을바람에 오곡이 익어가는 때

가을배추 아주심기, 가을 무 솎아주기, 풋땅콩 수확하기, 붉은 고추 수확하기, 씨마늘 준비하기





연재를 시작하기 전, 달력을 보며 절기마다 어떤 채소가 나는지, 채소로 어떤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지 1년 치를 쭉 정리했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오는 것들을 묶어두고, 그 사이사이 한철 잠깐 나오는 채소들도 빠짐없이 넣었다. 그중 여러 여름작물 가운데 하나로 토마토를, 그 요리로는 재작년부터 맛있게 해 먹고 있던 토마토 포카치아를 적어 두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었기에 망설임도 없었는데 막상 이 글을 쓰려니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토마토는 과일일까 채소일까? 우리 밭에서는 체리, 살구, 수박, 참외 같은 여러 과일도 나오는데 이들은 별다른 요리 없이 그 채로 먹는 작물이라 여기서 한 번도 다룬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조금의 의심도 없이 토마토를 이 목록에 넣었다는 건 적어도 나는 토마토를 채소로 여겨왔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고민도 없이 토마토를 채소라고 생각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나에게 토마토는 식후에 먹는 입가심용이 아니라 요리의 재료로 여겨지는 순간이 훨씬 많기 때문이었다.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검색을 해봤지만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토마토 과일•채소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대신 과일이자 채소를 부르는 "과채류"라는 말이 쓰인다. 사과, 복숭아, 포도, 블루베리와 같이 목본류(나무)가 아니라 초본류(풀)에 열리는 열매들을 부르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놀랍게도 토마토, 오이, 고추, 수박, 참외, 딸기, 옥수수 등이 모두 과채류에 속한다.


토마토 모종은 보통 5월 초, 어린이날을 지나 심는다. 이때쯤이면 늦서리 걱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 어버이날 즈음 가족이 함께 밭에 모여 점심을 먹고, 토마토·오이·가지 모종을 사다 심는 것이 우리 집의 작은 전통이 되어 왔다. 하지만 올해는 예외였다. 모종 사는 날을 기다리지 못한 엄마가 어느 날 이미 다 사다 심어 놓으신 것이다. 심지어 모종 사는 날 같이 가지 못한 나는 심는 것도 함께하지 못했다. 성격 급한 엄마에게 모종을 사는 날은 곧 심는 날이니까.



토마토는 키가 크게 자라기 때문에 지지대를 세워 묶어줘야 한다.



나는 늘 궁금했다. 어떤 작물은 씨앗을 받아서 저장하고, 어떤 작물은 씨를 사고, 또 어떤 작물은 모종을 사는지. 명확한 기준은 없었지만 엄마의 대답은 단순했다.


"늙은 오이 씨나 모종은 시중에 잘 안 판단 말이야."


결국 시중에서 구하기 쉬운 건 굳이 씨앗을 보관하지 않고, 구하기 힘든 건 손수 받아서 다음 해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씨앗이 잘 여물도록 끝까지 관리하고, 또 그것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덕분에 우리 집 밭에는 해마다 다른 얼굴의 토마토가 자란다. 모종을 판매하는 곳에서도 그저 "방울토마토"라고 묶어 팔기에 정확한 품종명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매년 심고 수확해 먹은 토마토는 어딘가 조금씩 달랐다. 동그랗고 빨간 방울토마토, 길쭉한 모양의 토마토, 주황색과 노란색 열매까지. 올해는 껍질이 유난히 얇고 색이 맑은 품종을 심었다. 이건 그래도 방울토마토라는 이름아래 묶이지 않고 "체리토마토"라는 이름으로 팔았다고 하는데 방울토마토 영문명이 체리토마토(Cherry tomato)인 걸 생각하면 뭐가 다를까 싶다.



토마토의 꽃.
꽃이 떨어진 자리에 열매가 자라기 시작했다.



토마토를 키워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토마토는 생각보다 크게 자란다. 특히나 고만고만한 도토리 수준의 우리 가족의 키는 금방 훌쩍 넘어 버린다. 크게 자라면 마냥 좋을 것 같지만 어느 높이 이상이 되면 그를 지지해 줄 지지대의 길이도 모자라고, 그렇게 높이 달린 열매는 수확하기도 힘들다. 특히나 우리 집 같이 많이 수확해서 판매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곳에서는 무작정 키를 크게 키우는 것이 좋은 게 아니다. 그래서 제일 긴 지지대의 높이를 넘어서면 메인 줄기를 잘라준다. 지금까지는 자르는 걸로 끝냈다고 하는데 올해는 내가 늦게까지 토마토를 먹고 싶어 자른 줄기를 다시 심자고 했다. 그래서 전보다 크게 키운 상태에서 자르고, 그렇게 잘라낸 줄기를 물에 담가 다시 뿌리를 받았다.



키가 크게 자란 토마토



식물을 번식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메인 줄기의 가장 윗부분을 잘라서 뿌리를 받아 다시 심는 것이다. 최소 2~3마디 이상 자르고 아래쪽 마디에 달린 잎들은 모두 잘라낸다. 이렇게 뿌리가 없는 상태에서 너무 많은 잎을 가지고 있으면 빨아들이는 물은 부족하고 잎의 증산작용으로 빠져나가는 물은 많아서 금방 시들기 때문이다. 또한 물에 닿는 잎은 금방 썩기 때문에 물도 오염시킬 수 있다. 이는 절화를 물병에 꽂을 때도 마찬가지로 물속에 담기는 부분의 잎은 다 떼주는 것이 좋다. (엄마가 잎을 떼지 않고 자른 그 상태로 물에 담가 놓았던 탓에 물이 썩으면서 몇 개의 약한 줄기도 같이 썩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건 안 비밀이다.)


이렇게 자르고 잎을 딴 토마토 가장 윗 줄기를 물에 담가 뿌리를 받았다. 그리고 뿌리가 튼튼하게 자라나자 이를 다시 흙에 심어주었다. 토마토를 심은 이랑을 정리하고 그곳에 다른 작물을 심을 때까지 열매를 맺고 있을 예정이니 본밭에 심지 않고 화분에 심었다. 토마토를 번식한 건 처음이라 이게 잘 자랄까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잘 자리 잡고 새로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잘라 낸 토마토 줄기를 물에 담가 새로 뿌리를 받은 모습
새로 심어준 줄기에서 열리고 있는 토마토



하지만 토마토도 계절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날이 추워지면 성장이 둔해지고, 수확은 서서히 끝을 향한다. 재작년에는 유독 늦가을까지 줄기가 시들어가는 와중에도 아직 푸른 토마토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런 토마토를 버리기 아까워 다 따다가 바구니에 담아 두었다. 후숙을 시켜 먹어보았지만 줄기에 매달려 햇볕을 받은 토마토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 차이를 절감한 끝에 여러 요리를 만들어 먹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포카치아도 식탁에 오르게 되었다.


올해는 더 늦게까지 토마토를 먹고 싶어 이모작을 시도했다. 아마 11월에도 우리 집 식탁에는 직접 기른 토마토가 올라올 것이다. 맛없는 토마토면 어떤가. 내가 맛있게 만들어 먹으면 되지. 손수 키운 제철 채소를 끝까지 아끼며 먹는 즐거움, 그 자체가 농사의 보람일지 모른다.



요즘 수확하는 채소들. 사진 상 가려진 것도 있지만 토마토, 가지, 수박, 참외, 오크라, 오이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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