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아이들

에피소드 19

by 진화정


춤추는 아이들

(에피소드 19)


제법 선선한, 그리고 쌀쌀한 가을이 되면, 우리는 국민학교의 교정을 돌며 낙엽을 쓸었다. 여름 한 철, 무성하게 번지던 푸르름을 이제는 하나둘씩 내려놓고, 학교 운동장을 하염없이 뒹굴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질감과 소리와 운치가 좋았지만, 낙엽을 쓸어 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거대한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내 손바닥 보다 훨씬 커다란 나뭇잎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들 사이로 송충이들이 우글거렸다. 화려한 무늬의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송충이들은 나의 비명을 자아내곤 했다. 어머나, 어쩌다 모르고 송충이를 밟았을 때, 신발 아래로 전해져 오는 묵직한 뭉클거림이란.


운동장 건너편 계단 앞, 우리 반 아이들이 모였다. 한낮 가을볕은 여름만큼이나 뜨거웠는데, 계단 위쪽에 쭈욱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 덕분에 나름 시원한 그늘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거기서 이것저것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다. 몇 아이들이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곤 했다는 것이다. 남자아이가 플레이어에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딸깍 버튼을 누르니, 아이들에게 익숙한, 비장한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면 그댈 떠나보내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사랑을 한다는 말을 못 했어 어쨌거나 지금은 너무 늦어버렸어 그대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그 미소는 너무 아름다웠어


이 음악에 맞춰 남자아이들이 운동장 바닥에서 흙먼지를 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노래에 맞춰 크고 화려한 동작이 다양하게 이어졌다. 단순히 몸을 흔드는 수준이 아니라, 손으로 땅을 짚고 다리를 사방으로 움직이고, 다시 일어나서 허공에 발차기도 했다. 그 시절 벌써 친구들은 브레이크 댄스를 구사하고 있었는데, 우리들은 신기하고 재밌는 눈길로 그걸 지켜보곤 했다. 우아, 하면서 박수도 치고 소리도 지르고. 남달리 키가 크고 기럭지 좋은 남자아이들이 신나게 춤을 추니, 다른 아이들도 어느새 박수를 치면서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다음엔 여자아이가 또 다른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딸깍 버튼을 눌렀다. 역시 익숙한, 상큼한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이번엔 여자아이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밤새도록 그리움에 편질 쓰고파


단순한 율동들이었지만, 아이들은 고운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함께 춤을 췄다. 음악에 흠뻑 취해서 해맑게 빛나던 아이들의 웃음이, 그 따뜻한 기억의 온기가 지금 차가운 새벽의 공기를 데우고 있다. 뭔가 대단한 신념이나 종교가 아니어도, 그때의 우리는 하나의 노래만으로도 함께 어울리고 하나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요즘 어떤 노래를 듣고 있나 생각해 본다. 우리 가요도 좋은 곡들이 많을 텐데, 팝송이나 가스펠을 즐겨 듣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불리고 전해질 우리 가요들. 요즘 음악들이 너무 냉정하고 세속적인 내용과 비트로 채워져 있지는 않나?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의 양심과 낭만이 중요한 때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지, 그때 춤추던 아이들이 말해준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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