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고춧가루

에피소드 22

by 진화정


어머니와 고춧가루

(에피소드 22)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업주부셨다. 한 번도 고용노동부에서 근로자라고 인정받은 적이 없는. 그렇지만 그 누구보다 바쁘고 힘들게 하루를 보냈던 사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어머니는 여러 가지 부업을 하셨고, 자투리 땅에 밭농사도 지으셨고, 고추를 직접 말려서 고춧가루를 만들기도 하셨다. 덕분에 나도 어머니 곁에서 망치로 금속을 두드리고, 비닐장갑을 접은 종이곽에 개수대로 넣고, 형형색색의 가발을 예쁘게 묶기도 했다. 밭농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거나 함께 물도 주고, 잡초도 뽑고, 콩도 따고, 깨도 털었다.


그중에서 고춧가루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한창 더울 무렵, 어머니는 어디선가 빨간 고추들이 가득 담긴 포대자루를 집에 가져오셨다. 나는 어머니와 부엌이나 동생방에 앉아 그 고추들을 선별하고 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이어서 고추 크기에 따라 가위로 여러 조각으로 잘랐고, 방안은 매운 고추냄새가 가득 퍼졌다. 그러고 나서, 구멍이 뽕뽕 뚫린 고추 말리는 망을 옥상에 깔고 그 위에 고추들을 늘어놓았다. 햇빛이 쨍쨍하게 내리쬐면 빨간 고추들이 더욱 검붉게 익어 갔다.


문제는 갑자기 비가 쏟아질 때였다. 방안에 있으면서도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날씨를 확인해야 했는데, 혹시 비가 조금씩이라도 내리기 시작하면 어머니와 나는 옥상으로 뛰었다. 우리는 그물망을 모아서 퍼져있던 고추들을 다시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가 없었으니 계단으로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했지만, 한 번도 실패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서둘러 방안에 그물망 속 포개어진 고추들을 다시 늘어놓고 선풍기들을 돌렸다. 비가 쏟아지니 창문도 열 수 없고, 빨간 고추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나오는데, 우리는 선풍기 바람을 쐴 수 없었다. 참고 견디면 어느덧 지나가는 그런 매운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고추들이 고슬고슬 예쁘게 마르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자루에 담아 아버지와 함께 방앗간에 가져가서 고운 고춧가루로 만들어 오셨다. 바로 그 고춧가루로 우리는 일 년 동안 음식도 만들어 먹고, 김장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때는 고춧가루를 만들거나 김장을 하는 일들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머니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가 하시는 일이니까, 어머니 혼자 힘드신 게 싫었으니까 함께 도운 것뿐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귀찮아서 어머니께 투덜대던 날도 있었고, 혼자 속으로 빨리 끝내고 놀고 싶다 생각하던 날도 있었다.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하다 보니, 그때 어머니가 왜 그렇게 일부러 고생을 하셨는지 알 것 같아서 눈물이 난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서, 우리가 잠들면 다시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셨던 어머니. 덕분에 우리 가족은 아침밥을 굶지 않고 학교로, 직장으로 나설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웃으며 반갑게 맞아 주셨고, 직접 간식을 만들어 주셨고, 숙제도 함께 도와주시곤 하셨다. 글을 써야 하는 숙제가 있으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내 옆에서 어머니는 설레고 기쁜 얼굴로 함께 고민해 주셨다. 어머니는 어릴 때 공부를 꽤 잘해서 중학교에 원서도 냈었지만, 줄줄이 생긴 동생들과 많은 농사일 때문에 외할아버지가 그 원서를 학교에서 되찾아 오셨다고 한다. 친구들이 공부할 시간에 동생을 업고 논에서 풀을 뽑았으면서도, 지금도 외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 착한 우리 어머니, 사랑합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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