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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심 실험: 만약 <병 속에 갇힌 벌>을 봤다면?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휴머니티를 생각하다

by 하루


모비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은 살아생전 무명의 작가였다.

그러나 '필경사 바틀비'를 읽는다면 그 순간 작가의 매력에 빠질 것이다.

76쪽의 짧은 단편이지만 문장 한 줄 한 줄이 깊은 인상을 주어 단숨에 읽게 된다.

책을 덮은 뒤에도 계속 입에서 맴도는 말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바틀비가 변호사의 질문에 정중하게 항거하는 이 글은

독자로 하여금 왠지 모를 불편함을 안긴다.

영어로 I would prefer not to~

왜 나는 불편함을 느꼈을까?



줄거리

'편한 삶이 최상의 삶'이라 생각하는 변호사 (화자)는

세 명의 필경사 터키. 니퍼. 진저와 함께 일한다.

변호사는 이들이 뭔가 부족하고 어설픈 반쪽짜리 노동자라 느끼지만 자신의 선량한 마음을 과시할 수 있기에 적당히 눈 감고 일을 맡긴다. 업무량이 늘어서 새로 채용한 직원이 바틀비이다. 그는 어떤 직원보다도 성실하고 근면해서 변호사는 맘에 쏙 들었다. 사무실 한쪽에서 삼일을 꼼짝 않고 필사만 묵묵히 해내던 바틀비는 어느 날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필사본 검토하는 일을 거부한다.

변호사는 업무를 이행하지 않는 바틀비를 해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자신의 이익과 동정심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붙박이처럼 고정된 채 떠나지 않는 바틀비에 대해 변호사 지인들이 험담을 하자,

변호사의 동정심은 자신의 명예와 평판에 피해를 준 바틀비에 대해 혐오와 증오를 느끼고 그를 둔 채 사무실을 이전한다.

결국 사무실에서 쫓겨난 바틀비는 부랑자가 되고. 툼스 교도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런 바틀비의 소식을 듣고 면회를 간 변호사는 차디찬 교도소에 누워있는 바틀비를 보며 자신의 탓인 양 양심에 불편함을 느낀다.

변호사가 넣어준 사식도 거부하고 바틀비는 스스로 곡기를 끊은 채 삶을 마감한다.

바틀비가 죽은 뒤 변호사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비틀 비가 필경사 일을 하기 전 소재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에서 일하다 부당한 해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그 시절 배달 불능 우편물은 사연을 확인한 뒤 소각했다고 한다.)

희망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희망.

재난에서 구제받지 못한 채 생명의 숨결이 꺼져버린 사람들을 위한 희소식.

모두 생명을 전하려 하러 나섰다가 이른 죽음을 맞이한 편지들.

바틀비와 같은 죽음의 편지들인 것이었다.



책 읽고 느낀 점

왜 바틀비는 변호사에게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다'라고 했을까?

이 책을 읽고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소외 문제와 인류애(동정심)이다.

18C 기술의 혁신은 산업을 더욱 발전시켰고, 산업의 발전은 대량생산을 위한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생산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바틀비와 같은 노동자는 인간으로서의 삶이라기보다 기계부품과 같은 처지였다. 시대가 변했지만 노동자는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여전히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책의 소제목이 <월스트리트 이야기> 이점을 고려해 보면 이해가 더 쉽다.

필사의 기원은 기독교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직업으로 신성한 노동이며 신의 의지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신성시되었던 노동의 가치는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노동으로 전락하고 인간의 존엄은 노동의 가치 추락과 함께 사라졌다.

현재는 더 비참하다. 이젠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AI로 이익을 더 극대화시키려는 자본가의 시도는 계속되고 쓸모없는 인간의 노동력은 갈길을 잃고 있다.


오래전이지만 서울역 지하철에서 보았던 노숙자들이 떠오른다. 서울역에 KTX가 들어서면서 노숙자들은 쓰레기 치우듯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한 곳에 고정되어 있던 사람들. 그들은 무능력한 인간으로 사회에서 취급된다. 그들이 사라져도 아무 이상 없이 세상은 돌아간다.

그들처럼 언젠가 노동의 가치를 하지 못하게 되는 때.

바틀비처럼 우리또한 가족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대상이 될 수 있다,

소재불능 편지와 같은 인간은 모두 바틀비처럼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자살의 문제는 절대 개인의 질병이나 심리적 문제로 발생하지 않는다고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다는 건 인간의 본성에 비춰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박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고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역설하고 있다.


우리가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에서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는 원서에 Humanity로 쓰여있다.

책 속 화자인 변호사가 생각하는 휴머니티는 동정이 발휘될 수 있는 구간이 있다고 보았다.

선을 넘지 않는 정도에서만 애정을 느낀다는 것.

너무 비참한 상황을 목격하거나 그 정도가 선을 넘어서면 동정심은 혐오와 증오심으로 바뀐다는 글은 공감이 되었다.

동정심이 일어나서 돕고 싶기는 하나 그 선이 있다는 것.

일반적으로 보통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당신의 동정심은 어디까지 가능한가요?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삶에 어려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삶의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이유이다.

소속의 욕구는 인간의 욕구 중 큰 것이다. 가족으로, 직장동료로, 이웃공동체로, 소소한 모임 등으로 어울려 지내고 싶은 것은 원시시대 사냥하면서부터 이어져온 인간의 본성 아닐까. 소속감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행복감도 안겨준다. 약화된 유대감은 자살을 더 부추길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삶이 어려운 점도 있으나 그 속에서 얻는 유대감과 소속감은 서로의 결속력을 키워준다.

독거노인, 혼밥, 비혼, 비대면, 돌싱, 등은 약화된 우리의 유대감을 증명하는 단어들이다

자살이 사회 문제로 두드러지고 있는 지금 우린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고민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라면 (병 속에 갇힌 침을 가진 벌-바틀비를) 구할 수 있을까요?

도움을 주려고 손을 뻗은 나에게 벌이 침을 쏠까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무서운 침을 가진 벌은 우리에게 꿀과 식물의 꽃가루를 옮겨주는 이로운 곤충이다.

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 생태계가 위험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벌이 없다면 아름다운 꽃을 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갖고 살려야 하는 이유다.

벌에게 알맞은 환경을 찾아서 말이다.


고아나 다름없던 어린 시절

8살에 극단에 들어간 <찰리 채플린 >의 명언으로 이 글을 마친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돕길원한다.

인간 존재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불행이 아니라 서로의 행복에 의해 살아가기를 원한다."


난 그러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다.
I would prefer not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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