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조건

by 이월

산책하는 일은 기분 전환에 도움을 준다. 이 말을 많이 들은 것 치곤 꽤 늦게 공감하게 되었다. 어릴 때는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니며 놀기에 바쁘다가 저녁 시간이 되면 놀이터 담 너머로 들려오는 밥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목소리에 집으로 돌아가던 골목대장이 직장인이 되자 하루에 3,000보를 겨우 넘기는 어른이 되었다. <나 혼자 산다> 같은 관찰 예능에서 연예인들이 산책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걷기를 하면 생각이 정리된다거나, 쳐져 있던 기분이 풀린다든가 하는 장점들을 이야기할 때면 건강한 삶이 제법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산책의 장점을 많이 들었는데도 내가 방구석 돌하르방이 된 이유가 뭘까, 게으름에 핑계를 붙여보자면 산책에 필요한 조건들이 제법 까다롭기 때문이다. 날씨가 짓궂지 않을 것,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있을 것,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건강할 것. 나열해 놓고 보니 산책이라는 별거 아닌 행위가 제법 품이 드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많은 이유 중에서 나를 무겁게 한 것은 걷는 동안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멀리 가긴 싫으니, 동네를 뱅글뱅글 돌아야 할 텐데, 똑같은 풍경을 보면서 걷는다는 게 선뜻 몸을 일으킬 정도로 즐거운 일로 와닿지는 않는다. 그러던 중, 어떤 이유에서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전 시간을 활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 강사라는 직업 특성상 점심시간쯤 출근해서 밤 9시 이후 퇴근하기에 밤낮이 바뀌는 생활로 살기 쉽다. 그 때문에 아침이랍시고 일어나보면 11시가 넘어서 이미 점심을 바라보는 시간이기 일쑤였다. 해가 있을 때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쌓인 건지 아침형 인간이 성실하다는 여러 콘텐츠들의 압박 때문인지 6년 동안 일하던 미술학원을 그만뒀을 때 아침에 밖에 나가보자는 아주 큰 결심을 했다.*


*나의 8~9시는 남들에겐 새벽 5-6시쯤이라서 이 정도면 나에겐 미라클 모닝이다.


목적지는 가까운 도서관이었다. 근처 카페들은 대부분 11시 이후에 문을 열기 때문에 오전에 시간을 보낼 만한 곳으로 도서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직 한참 잘 시간에 억지로라도 몸을 깨워서 좀비처럼 집 밖을 나서면 9월의 햇살과 아침의 고요함이 마중 나와 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20분쯤 걸어서 도서관에 도착하면 책을 골라야 하는데, 이것도 참 큰일이었다. 기껏 쇼핑하러 왔지만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과 같이, 수많은 책 중에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였다. 잠깐의 방황 끝에 우연히 잡은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집이 며칠간 산책의 목적지가 되어주었다. 신춘문예 책 중에 아무 연도를 골라 잡아서 목차 순서대로 수록 집 한편을 다 읽을 때쯤이면 잠이 쏟아져서 집으로 귀가하게 된다. 꾸물꾸물 이불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한 시간 가량의 낮잠을 잔 후에 하루를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을 하다 보니 오전 시간에 몸이 점점 깨어나서 수록 집 한 편 읽던 것에서 두 편이 되고, 집에 가서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책을 대여해서 근처 카페에서 마저 읽기도 했다. 신춘문예를 읽을 때는 책을 대여하지 않고 보던 터라, 도서관에 갈 때마다 누가 빌려 갔을까 봐 조바심도 났다. 늦여름과 가을 사이의 아침을 좋아하는 것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경험이 나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 아침과 도서관의 고요함 속에 느낀 것은 일종의 해방감 같았다. 학원강사 일에 지친 것에 대한 해방감이 아니라 그동안 미뤄놨던 것을 행동했다는 속 시원함에 더 가까웠다. 이토록 즐거운 시간은 아쉽게도 한 달도 채 못 즐기고 끝났다.


아침 산책을 즐긴 것은 1년도 더 된 일이다. 그사이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여전히 아침을 활용 못 하는 못난 사람처럼 지내다가 근래에 다시 부지런히 움직여보고 싶어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경칩을 하루 앞둔 날이다. 아침을 쓰기 위해 일찍 카페에 가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편두통 때문에 좀 더 누워 있느라 늦게 나오게 되었다. 그 바람에 겨우 삼십 분이라는 자유시간만 얻었던 오늘.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휘몰아쳐서 산책길에 있는 카페에 가는 것은 포기하고, 집 건물 1층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늦게 나온 게으름에 투덜거리며 늘 앉는 자리에 할 일들을 펼쳐놓을 때 옆자리 앉은 할아버지 두 분의 대화가 귀로 들어왔다.


‘내일이 경칩이야.’ , ‘그래.’ 두분은 안개처럼 뿌옇도록 내리치는 눈을 카페 통창 너머로 보고 계셨다. ‘개구리가 일어날 텐데 추워서 어떡한담.’, ’추우면 밖으로 나오지 않고 더 자겠지.’ , ‘경칩은 개구리가 나오는 날이잖아’, ‘나오려고 해도 추워서 다시 들어갈 거라고.’ 개구리가 일어나는 날인데 아직 날이 추워서 걱정하는 할아버지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귀여운 마음이 들었고, 스스로에게 투덜거리던 마음도 풀어졌다. 어딘가에 있을 작은 개구리도 사랑을 받는데, 나는 스스로를 너무 질책한 것 같았다. 오전 시간을 날리는 게 싫다면서 크게 바뀌지 않는 행동은 필시 못난 모습이지만, 필요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것 같다. 조금 생긴 오전 여유시간에 다른 연락이 오거나 잘되던 블루투스 이어폰이 갑자기 연결 오류가 떠서 해결해야 하는 등의 예상치 못한 일로 시간이 야금야금 줄어들면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좀 더 일찍 나왔다면 방해가 되는 일이 생겼어도 시간 여유가 있었을 텐데, 나는 왜 침대에서 한 번에 못 일어나며, 늘 어디가 아프고, 결심을 단번에 지키지 못하느냐는 생각들이 하루의 시작을 열고 있을 때가 많았다. 돌이켜보니 하루 시작을 새까맣게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전 시간을 집착하는 만큼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취미 활동을 할 때가 많다. 안 해도 그만일 것 같은 시간에 지각이라며 씩씩거리는 게 필요 이상의 짜증같이 느껴졌다. 질책하는 나와 굼뜬 나를 둘로 나눠서 굼뜬 나에게 학생 역할을 줘보자. 커다란 물병을 들고 빈 물컵에 물을 채우는 일을 하는데 요령이 없는 굼뜬 나는 물을 엎질러 버리기 일쑤고 선생님인 또 다른 나는 괜찮다며 흘린 물을 닦고 빈 컵을 다시 세워놓는다. 이걸 반복하면서 성공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보는 중이라고 상상하며 다독여본다. 온화한 표정의 선생님쪽인 나도 속으론 부글부글하겠지만, 어쩌겠는가 굼뜬 아이가 해낼 때까지 같이 고민해야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학생 자신의 노력에 비해서 혹은 선생의 노력에 비해서 실력이 안 늘 때가 있다. 선생님이 시키는건 하는 데 머리를 안 쓰고 손으로 연습만 하니까 단점 보완이 안 되는 학생도 있고, 그림 보는 눈이 높아져서 머리로는 멋있는 그림을 상상했는데 손이 안 따라준다며 속상해하는 학생이 있다. 후자는 걱정이 없다. 레벨업하기 바로 직전에 겪는 경험이라 오히려 잘되고 있는 거라고 웃으며 등을 팡팡 쳐준다. 문제는 전자다. 그림 종이 장수만 채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여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약한 학생이다. 이럴 땐 온갖 방법을 다 써서 학생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열심히 엉덩이를 밀어준다. 이럴 땐 정말 무거운 잠만보*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 같은 노력을 짜내야 한다.


그 문제 학생이 지금 내 안에 있다. 얘는 너무 무겁다. 너무 멍청하기도 하고.** 얘를 데리고 이리저리 노력하다 보면 봄이 찾아올 것 같다. 날이 풀리면 또 도서관에 가자고 꼬셔야겠다. 좋아했던 아침 산책을 하자며 카디건을 챙겨주면 입고 나갈 것도 같다. 그전에 일찍 일어나서 출근 전 2시간 이상 사용하기에 성공하면 대견한 거고, 안되면 최후의 방법으로 봄 햇살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포켓몬스터> 에 나오는 거대한 곰. 먹고 자는 것이 일상인데 한번 잠들면 안 움직인다.

**문제아가 나여서 시원하게 욕할 수 있다.


누군가에겐 손쉬운 일이 나에겐 거대 프로젝트라니, 답답하고 창피한 기분도 든다. 반대로 내 일상의 어떤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언젠간 해내고 싶은 희망 사항 중 하나일 수 있을까. 예를 들어서 출근 시간이 늦어서 아침에 충분히 자고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있는 부분이라던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스티커 만들어 팔아보기 같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누군가는 미루고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서로 영향을 받으며 자신에게 빈 곳을 채우려는 노력을 많은 사람들이 하겠구나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남들이 가진 쉬운 일상을 따내기 위해 팔딱팔딱합시다. 다른 사람도 당신의 일상의 한 부분을 부러워하고 있을 테니 혼자만 못났다고 생각하진 말자고요. 아자아자. 우리네 존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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