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쯤 되니 장례식을 몇 번 겪은 나이가 되었다. 아직은 손에 꼽을 정도로만 경험해서 부고 소식이 들려오면 유튜브에서 장례식 예절 쇼츠를 찾아서 복습하고 어색한 발걸음을 옮긴다. 첫 장례식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외할머니의 장례식이었다. 장례식이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꼬마들은 식장을 빠져나와 주차장에서 비눗방울을 불며 놀았다. 죽는다는 게 뭔지 잘 모르면서도 하늘로 올라가는 비눗방울이 할머니에게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보니 그게 외할머니에게 드린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던 것 같다.*
*비눗방울들이 생각보다 높이 안 올라가고, 대부분 내 머리 높이에서 둥둥 떠다니다가 내려왔다. 아쉽지만 선물은 못 드린 걸로 해야 할지도. 사랑해요 할머니.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나서 서른 언저리쯤 되었을 때, 아빠를 따라 장례식장으로 출발한 차 안에서 누구의 장례식인지 설명을 들었다. 어릴 때 명절이면 찾아갔던 가평의 큰집 할머니라고 했지만, 당최 모르겠어서 내가 너무 어릴 때 뵌 분이라서 기억이 안나는 어르신인가 보다 했다. 도착해서 영정사진을 보니 그때야 아! 하고 기억이 났다. 가평 큰집에 가면 많은 어른들이 계시는데, 어린 나는 왕할머니나 증조할머니처럼 정확한 명칭을 기억하기 힘들어서 명칭을 빼고 모두를 할머니라고 두루뭉술 불렀다. 그 많은 할머니 중 한 분이셨다. 어릴 때 이후로 뵌 적이 없어서일까, 슬픔이 크지 않고 그저 살아계실 때 한 번 더 만나 뵈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만 들었다. 어렴풋한 기억들 속에 서운하거나 싫은 감정이 없이 남아있는 할머니였다. 아빠 옆에 얌전히 앉아서 밥을 먹으려 할때 오랜만에 만난 큰집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른들이 나를 둘러싸고 얘가 이렇게 컸네, 나 기억하냐, 돼지가 살이 없어졌네* 라며 이십여 년 전처럼 나를 놀렸다. 여자 어른들은 성장한 나를 보고 놀라고 남자 어른들은 놀릴 거리를 찾아 콕콕 찌르며 치아가 드러나게 웃었다. 장례식장이 아니었다면 그간 못다 한 삼촌들의 장난을 몇 배는 받아내야 했을 것이다.
*돼지라는 말에 상처 받지는 않는다. 친척들이 부르는 애칭의 느낌이기도 하고 놀림받는 것에 원체 둔하다.
또 시간이 흘러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부터 함께 살던 외삼촌이 우리 집에서 돌아가셨다. 대학 졸업 후 자취를 시작해서 이후부터 나는 같이 살지 않았지만, 치매에 간질도 있는 외삼촌을 돌보는 일은 남은 가족들에게 힘이 드는 일이었다. 요양원을 꾸준히 권했지만, 엄마는 요양원을 알아보기만 하셨다. 삼촌의 장례식은 마치 엄마의 장기근속 퇴사 기념날 같았다. 친척들이 모여 엄마에게 수고했다며 연거푸 이야기했다. 그럼, 엄마는 최근에 치매와 간질 상태가 악화하여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며 고생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고인을 찾는 사람이 없는 장례식 같았다. 엄마가 10대일때 외할머니는 어렵게 살던 이웃들을 자주 도왔는데, 그시절 은혜를 갚겠다며 지천명이 훌쩍 넘은 어떤 어른 한 분이 장례식 비용을 전부 지불하기도 했다. 장례식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 수도 있겠지만, 참 훈훈한 마무리였다.
그리고 바로 이주 뒤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증손까지 본 할아버지는 다섯의 손녀와 둘의 두 명의 손자가 있는데 그들의 초등 자녀들을 제외하곤 모두가 울음바다였다. 불과 이 주 전의 삼촌 장례식과는 달랐다. 연세가 많으셔서 가신 거라, 몇 년 전부터 다들 마음에 준비는 하고 있었고 나도 속상함보다는 받아들이는 마음이 더 컸음에도 눈물이 계속 나왔다. 열 살 위쯤의 고종사촌 언니가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좋은 기억을 많이 주셔서 계속 울게 되는 거라고 했다. 내가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힘없이 누워계셨다. 그때도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하는 소식에 찾아갔던 날이었다. 건강하실때는 산을 타고 돌아다니시던 할아버지임을 알기에 할아버지에게 심심해서 어떡하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웃으시며 심심해도 어쩌겠냐고 하셨다. 낄낄 웃으시는 할아버지를 보고 역시 우리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곤 열 살 때처럼 방방 뛰며 인사를 했었다. 조부모님이 옆 동네에 사시던 어린 시절엔 자주 뵈었었다. 언제 한번은 같이 길을 가다가 장난기가 발동한 할아버지가 나를 놓고 후다닥 무단횡단 했고, 건너지 못한 나는 ‘할아버지! 아직 초록불 아니야’라고 외쳤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할아버지가 ‘초록색 옷 입어서 괜찮아’라고 답변했다. 그날 할아버지는 초록색 옷을 안 입고 있었다. 더 어릴 때는 매운 걸 먹고 후 아후아 숨을 내쉬는 나에게 고추장 먹으면 안 맵다며 고추장을 건네셨다. 내가 좀 크니 아래 동생이 같은 방식으로 당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손녀 손자들이 모두 당했던 장난이다. 할아버지와 함께 오르던 동네 공원 계단이 딱 100개라고 하시던 것도 나중에 혼자 가봤을 때 하나씩 계단을 세어보면서 거짓말임을 알았다. 할아버지는 손가락이 하나 없으셔서 어린 맘에 손가락이 왜 없냐고 묻자, 돌아가는 세탁기에 손가락이 빠졌다며 세탁기는 아주 무서운 거라고 겁을 주셨다. 우연히 이토 준지 원작의 영화 소용돌이**을 보고 둘 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임을 알게 되었다.
*동생은 고추냉이였다.
**소용돌이와 관련된 죽음들이 나오는 영화. 그중 세탁기 안에서 소용돌이 모양인 듯 기괴하게 죽어있는 사람이 나온다. 어릴 때 큰아빠네 갔다가 언니들을 따라서 보게 되었다. 세탁기에 사람이 빠져서 죽는다는 건 어릴 때 봐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성기 배우를 닮은 잘생기고 키가 크신 할아버지는 유머 감각도 뛰어나서 젊은 시절 인기가 많으셨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끝없이 눈물이 났지만 괴로운 슬픔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장난이 이제 정말로 추억이 되어버리는 것에 대한 속상함에 가까웠을까. 입관식 때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말하길 나쁜 걸 다 가져가고 좋은 걸 가져다주시라고 했는데, 만화의 한 장면처럼 영혼이 된 할아버지의 표정이 상상이 되었다. 분명히 ‘에잉 뭐라는 거야 난 놀러 갈래’ 하시곤 가벼워진 몸으로 휙 산책하러 나가셨을 것이다. 진지한 엄마의 부탁을 받아줄 리 없는 할아버지를 상상하자 추후 내 장례식에 온 사람들도 이렇게 유쾌한 기억으로 날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장례식에 제자들이 만약 찾아오게 된다면, 인사를 받은 상주가 종이와 연필을 내밀어서 ‘고인이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크로키*해라. 라고 하십니다’라며 말을 전하고, 그러면 내 제자들은 이게 무슨 엉뚱한 상황인가 어리둥절하면서도 나를 잘 알기에 울고 웃으며 ‘손으로 그림 그리는 거 너무 오랜만인데’라며 그림을 그리곤 내 영정사진 앞에 두겠지. 영혼이 된 나는 그림 지적을 하고 싶지만 내 잔소리가 상대방에게 안 들려서 답답해할 것이다.**
*크로키란 짧은 시간 안에 그림을 그리는 것.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손 풀기용이나 드로잉 연습을 위해 하곤 한다.
**제자들한테 말했더니 분신사바로 선생님 영혼을 소환해서 빨간색 펜으로 검사받을 거라고 했다.
같은 해에 한 번 더 장례식을 갔는데 이번엔 내가 상주였다. 조문객이 없는 장례식이라 크게 할 일은 없었다. 염하는 걸 기다리고 추모 시간을 가진 후 화장 시간을 기다리는 일 정도였을까. 아니 그 전에 병문안을 갔을 때부터 장례를 준비한 걸까. 아니면 그 전에 길거리에서 배곯고 있는 노란 덩어리에 밥을 밀어 넣어줬을 때부터일까? 인기척에 놀라서 1층이었던 우리 집으로 들어와 신발장에 숨었을 때부터 나는 이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노란 덩어리는 고양이였다. 선천적으로 몸이 좋지 않아서 다른 고양이들처럼 스무 살까지 사는 장수를 기대하긴 어렵겠다고 각오는 했으나. 9년의 동거가 끝이 나자 그리움에 슬프고, 떠올리면 행복한 존재가 되었다. 집 곳곳에 룸메이트였던 고양이가 자주 누워있던 장소를 지긋이 바라보면, 별안간 슬픈데 행복한 얼굴이 된다. 오묘한 이 표정을 계속하면 슬픈데 행복한 연기로 이광수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광수 배우가 예능에서 기쁜데 슬픈 연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 재미있으니 찾아보시길 추천한다.
누군가가 나를 떠올릴 때 고양이만큼 포근한 마음이 들 수 있을까. 내가 느낀 포근함은 사람과 동물이라는 서로 다른 관계에서 오는 특별함 같기도 해서 불가능할 것 같다. 나는 같이 살았던 노란 고양이에게 안도감을 주는 사람이었을까. 그 아이는 나를 만나서 삶이 괜찮았을까. 그 애는 어쩜 그렇게 나에게 미운 마음 하나 없이 행복함을 가득 줄 수 있을까.
엄마의 엄마 장례식, 잊고지냈던 큰집 할머니, 장난기가 가득한 우리 할아버지, 아홉 살 룸메이트의 장례식. 네 번의 장례식을 돌아보니 유쾌하고 무해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될까. 무척 어려울 것이다. 예민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다가도 넌 어쩜 그렇게 둔하냐는 말도 듣는다. 이런 양면성을 가진 사람인 이상 온전히 한가지의 모습으로 기억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도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면 편한 마음이 들면 좋겠다. 그래야 내 장례식에서 맘껏 장난을 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제일 신나게 장난칠 수 있는 날에 내가 없다니 정말 아깝다 아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