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에 가기 전날, 두 시간 가까운 거리를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독서를 하며 유의미한 시간으로 채우기 위해 가방에 책 한 권을 넣었다. 하지만 늘 유튜브를 보다가 집에 도착해버리고, 십 년 전에 떠나온 내 방에 들어가 예능 몰아보기를 하면서 폰 게임을 하다 늦은 새벽에 잠이 든다. 자췻집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 하면 마음이 불편한데 부모님 집에만 오면 하릴없이 투니버스 채널을 보던 초·중생으로 돌아가 버린다.
잠이 깬 아침, 내 방에서 적당히 떨어진 거실 TV 볼륨이 들려온다. 딸이 돌아갈 때 겉절이를 해서 보낼 거라며 아빠에게 배추를 사 오라고 재촉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 교복을 입던 나이의 어느 날, 그때도 딱 이런 느낌이었는데. 너무나 일상이라서 회상조차 안 할 것 같았던 과거의 어떤 시간과 닮은 오늘이 덥석 왔다. 평균보다 두세 칸은 더 올라간 TV 볼륨을 따라 ‘옛날에 했던 거네, 쟤 엄청 컸잖아’라며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는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엄마 아빠 목소리, 분주한 부엌의 소리, 탈탈 돌아가는 오래된 선풍기 소리. 느지막이 들려오는 집의 소음을 이불 삼아 뭉그적거리다가 거실로 나왔다.
타이밍이 안 맞아서 오랫동안 얼굴을 못 본 우리 집 경력 3년 차인 검정 개가 나를 어색해한다. 이럴 땐 내향인, 아니 내향견이 안심하고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오늘따라 익살스럽게 자꾸 만지게 된다. 나에게 다가오지 않을 검정 개에게 서운할 수도 있지만 자업자득, 각오를 한 침범이다.
이 집에서 10년 이상 살던 나보다 더 이곳을 자신의 공간으로 익숙하게 여기는 검정 개에게 불청객이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든다. 다음엔 검정 개가 먼저 나를 반가워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고 내가 침범한 거실이 익숙해질 때까지 무심한 태도로 있어야겠다. 고양이를 키워서 동물이 나라는 불청객에게 안심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나의 숙련된 기술보다 반가움이 더 커서 어쩔 수 없었다. 덩치 큰 검정 개가 이해해 주기를. 사랑이 튀어 나가 손으로 쓰다듬고, 그렇게 다가가 가까이에서 본 검정 개가 예쁘고, 몸이 건강한 것이 확인되면 그런 무사함이 또 너무 좋아서 다시 예뻐하는 연결고리가 멈춰지지 않는 날이었다.
부엌일로 바쁜 엄마가 빻으려고 내놓은 마늘을 내가 낚아채서 아빠와 함께 <전국노래자랑>을 보며 콩콩 이고 있는데, 엄마가 와서 보더니 느리고 답답하다며 뺏어갔다. 엄마의 절구가 움직여보지도 못했는데 아빠가 다시 뺏어서 숙련된 조교의 시범을 보여준다. 마늘을 많이 넣고 찧으면 밖으로 튀어 나가니깐 조금씩 하던 나에게 아빠는 마늘을 우선 짓이기듯이 눌러 낸 후에 빻아야 한다며 자신만의 꿀팁을 알려주고는 일을 끝내버렸다. 세 명이 돌아가며 빻은 마늘 일부를 내 짐에 넣는다. 자취하면서도 비싼 국내산 마늘을 쓸 수 있는 사치를 부모덕에 누린다.
차에 태워 자췻집까지 데려다준 아빠는 무거운 한약 한 박스를 우리 집에 들여놓는다. 이걸 먹으면 부작용으로 살이 찌거나 하진 않는지 걱정하는 딸에게 한약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반품을 막아선다. 한약은 체질에 예민한 약 아닌가 싶다가 내 거절이 통할 리도 없고, 옥신각신 끝에 돌려보낸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무정하게 군 내 마음도 불편할 테고, 귀한 거니 다른 사람 주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며 지켜 온 아빠의 한약 박스가 주인을 잃어 거실에 덩그러니 다시 놓이면, 그걸 보는 부모 마음은 또 어떻겠는가. 잠깐의 시뮬레이션 끝에 그냥 받았다. 이 많은 한약을 하루에 3포씩 먹어야 한다. 사랑은 고난이다.
엄마보다 이모가 더 좋다는 네 살배기 딸의 말에 자신의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서 일러바치는 우리 언니. 엄마는 충격받은 큰딸에게 ‘너희도 엄마보다 이모가 더 좋다고 했잖아’라는 말을 이중 삼중으로 반복해서 했다. 이십 년을 묵혀둔 귀여운 복수의 말을 드디어 발사한 날이다. 웃음 터진 복수극이 영상통화를 종료 함으로써 끝났다. 어릴 땐 쓴소리 많이 하는 엄마가 우리 편이 아닌 줄 알고 서운하고 슬펐고 가끔 만나면 반가워해 주는 이모가 더 좋아 보였던 때가 있었다. 두 딸도 잊고 있던 시기를 엄마는 마음에 두고 계셨나 보다.
나도 언젠가 아이가 생길까, 생긴다면 그 아이에겐 어떤 소리가 집의 소리가 될까. 그때의 나이든 나는 지금의 우리 엄마처럼 아침형 인간이 되어있을까. 나는 여름을 좋아하는데 그 아이는 어떨까, 혹은 네 살인 조카는 커서 어느 계절을 좋아하게 될까. 내 제자들은 어떨까. 누구던, 나와 어떤 관계이든 아이들 각자 평온한 하루의 일상 소리를 간직한 채 살았으면 좋겠다. 별일 없음이 너무 존재감이 없어서 모르고 지내다가. 문뜩 어느 하루, 눈을 뜬 아침 집에서 별일 없음을 눈치채서 이불에 조금 더 투정을 부리는 늦은 아침 사치를 부리기를.
모래시계처럼 시간이 쏟아져 내 윗세대의 어른들이 적어지고, 아랫세대가 많아지는 때, 누군가 맘 편히 있다가 가는 약수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평온함을 주는 사람이 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울지 모른다.
유치하고 엉뚱한 상상으로 같이 웃기도 하고, 엄마보다 이모가 좋다는 아이의 투정을 듣기도 하고,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해도 죽어도 안 움직이며 게임만 하는 자식의 뒤통수를 뜨겁도록 째려보고, 용돈으로 회유하고 협박도 하는 평범한 잔소리쟁이가 될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소리. 집에서 나는 일상의 소리에 내 소리가 더해질 테고, 누군가의 기억으로 남겠지. 나는 그 소리 사이에서 내가 듣고 자란 소리를 그리워하는 날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