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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과 내면

by 정은하

사회적 통념에 따른 나의 외면의 모습은 밝고 명량한 소녀다.


웃을 때 휘어지는 눈꼬리, 올라가는 입꼬리, 높아지는 목소리, 음절 하나하나에 따라 움직이는 나의 두 손.

난 드라마에 나오는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고 산 철없는 소녀 같은 그런 이미지였다.


그 틀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어떠한 법도 규칙도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나는 밝고 명량한 웃음을 짓도록 교육받았다. 물론 어린 나에게 기분이 안 좋은 날은 많았다. 엄마가 정해준 옷 색깔이 맘에 안 들거나, 오늘 밥반찬이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아니었다던가, 그런 사소한 짜증에 조금이라도 표정이 안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부모님의 ‘표정 좀 풀고 다녀라’라는 말과 함께 따가운 질책이 다가왔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은 나는 성인이 돼서 사회생활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외면의 모습은 완벽한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으로 거듭나있었다.


회사생활을 하며 항상 들었던 말은 '어쩜 그렇게 웃는 게 이쁘세요?'라던지, '은하씨가 인사해 줄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라는 그런 말들이었다.

당연히 그 말들은 나를 위한 말이겠지만, 그 칭찬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는, 나의 외면이 완벽한 모습에 가까워질수록 내면의 모습은 썩어 고이다 못해 문들어지고 있었다.


그런 나의 우울함이 내 속에 고이다 못해 밖으로 터져 나올 때 항상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냐며 나의 안부를 묻곤 했다. 처음에는 그 안부 속 에는 사람의 정이, 사람의 따뜻함이 담긴 말이라고 생각해 속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솔직함은 어떤 사람들에겐 나를 공격하는 수단이 되었고, 어떤 사람들에겐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외면의 가면을 쓰고 아무 걱정 없는 우울의 우자도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갔다. 그럴 때마다 내 안의 넘쳐버린 나의 울음 바구니는 밤마다 나를 괴롭혔고, 나는 밤마다 바구니를 비워내느라 애썼다. 비워도 비워도 비워지지 않는, 누군가 항상 내 바구니에 물을 붓는 것 같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결코 티 낼 수도, 드러낼 수도 없었다.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만 우울은 나눠봤자 아무에게도 도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든, 단 하나뿐인 가족이든, 그 당시 나의 전부인 애인이 든 간에.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의 경험상 그랬다.


친한 친구들은 처음에는 걱정 어린 말로 나를 위로해 주더니 점점 나의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나의 상태에 대해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언제쯤이면 좋아지는지, 언제쯤이면 약을 그만 먹는지가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 당시 하나뿐인 애인들은 글쎄, 모두 다른 형태로 날 걱정했지만 그 끝은 항상 지금 일 때문에 너무 바빠, 그리고 너만 힘드니 나도 힘들어 모든 사람들은 우울증을 가지고 살아 라는 말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나는 나의 우울을 남과 나누지 않는다.


물론 진정으로 걱정해 주고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지인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우울은 나 혼자 견뎌내야 하고, 나 혼자 가져가야 하는 것, 남에게 징징되어 봤자 해결되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은 혼자서 이겨내야 한다.


여러분들은 그런 적 있는가?

가장 믿었던 가족에게 ‘우울할 때 읽기 좋은 책을 샀는데 언니도 읽어볼래?’라고 말했을 때 돌아온 대답이 ‘난 안우울한데 내가 그걸 왜 읽어야 해?’라는 대답이었다면,

그때 내 마음속에 사람들과 이어져 있던 작은 끈이 끊어졌다면, 그렇다면 나는 나의 우울은 나만 간직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외면과 내면을 끊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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