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다 보면 흔히 하는 질문 중 하나가 ‘바다가 좋으세요, 산이 좋으세요?‘ 일 것이다.
20살의 나였더라면 고민하지도 않고 당연히 바다죠.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땐 그랬다. 바다를 선택했다. 왜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바다란 우울함과 동격으로 표시되며 바다에 깊숙이 빠져버린 사람들은 우울 속에 깊이 빠져버린 사람들로 묘사되곤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랬던가 나는 바다를 선택했다.
나의 우울함을 대변해 줄 것만 같은 짙은 푸른색, 내 마음처럼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깊이, 그리고 나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액체가 뜬금없는 풀보단 출렁이는 바다랑 연관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내게 물을 땐 바다라고 대답했지만 막상 물을 바라보는 것에 흥미가 없었고, 물에 들어가 발을 담그거나 흔히 물놀이를 한다는 행위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냥 사람들이 우울함은 바다와 같다고 해서 그냥 바다를 선호했다.
나의 친구들은 생각이 많은 날 보고 바다라도 보러 가서 생각 정리 하고 와라고 했지만 막상 겉으로만 동의했을 뿐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에게 바다는 땅 위에 물이 채워진 형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 그냥 나는 나의 우울함이 세상 통념에 바다로 치부된다길래 그냥 바다를 선택했을 뿐, 바다에 대한 아무 생각도, 의미도, 관심도 없었다.
그렇게 우울과 모든 시간을 공유하는 게 일상이 될 때쯤 어느 날 문득, 아 초록 풀을 보고 싶다. 싱싱하고 생기 있고 이슬을 머금은, 살아있는 초록색 형태를 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때부터 나는 미친 듯이 도심 속 숲을 찾아다녔다. 나무와 잎사귀들을 보며 그들이 살아있음에 나도 살아있음을 느꼈고, 풀들이 내뿜는 공기들을 마시며 내 폐 속으로 들어오는 상쾌한 공기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 풀들이 주는 은근한 상쾌함을 느끼기 위해 카페를 가든, 식당을 가든, 나무가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 나는 바다보단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20살 후반이 돼서야, 이제야 깨달았다.
실제로 풀을 보러 가지 못한 날들은 식물에 관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풀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 나무의 오랜 역사, 그들이 주는 편안함과 안식처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모든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그렇게 나의 책장에는 식물에 관한, 나무에 관한, 풀에 관한 책들이 하나 둘 자리 잡았다.
바다와 산, 뭐가 그렇게 달라서 너는 산을 더 좋아해?라고 묻는다면,
칙칙하고 어두운 파란색보단 다양한 색깔의 초록색과 연두색을 좋아함을 깨달았고,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나에겐 생채기가 돼서 돌아왔지만,
숲 속의 고용하고 조용한 풀들이 움직이는 소리는 내 마음을 간지럽혔다.
또, 알 수 없는 깊은 깊이의 물속은 나를 두렵게 만들었지만,
내 눈앞에서 신선하고 새로운 공기를 만들어내는 잎사귀들은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어렸을 땐 한강이 보이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숲이 보이는, 나무들이 울창한 곳에서 풀들과 나무가 주는 생명력을 받으며 살아보고 싶다.
그렇게 지낸다면 나의 짙은 파란 우울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초록으로 변해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