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오지 않으니까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우리는 자주 조건을 붙입니다.
더 좋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돈이 좀 더 생기면,
시간이 나면.
그런데 그런 때를 계속 기다리다 보면
내가 바라는 순간은 결국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멈춰서, 내가 진짜 뭘 원하는지 들여다봤습니다.
뭘 하고 싶은지,
무엇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지.
그리고 그걸 하나씩 적어보다가 알게 됐어요.
꼭 가정법을 붙이지 않아도,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요.
대화 모임 '앙가주망'을 열 때, 스스로와 약속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모임 참여비가 쌓이면, 그 돈은 기부하자.
큰돈은 아니지만, 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운영한 만큼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사실, 기부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 계기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습니다.
대학교 면접에서였어요.
줄줄이 떨어진 끝에, 마지막으로 보게 된 면접.
면접 질문이 이랬습니다.
"아프리카의 기아 아동과 한국의 소년소녀 가장 중, 누구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의 기아 아동들은 태어날 때부터 의식주 자체가 무너진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사람답게 살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 삶.
그건 단순한 생활고를 넘는, 생존의 문제라고 생각했거든요.
한국의 소년소녀 가장들도 물론 힘들지만,
그래도 누군가 손잡아줄 수 있는 제도가 있고,
아주 작더라도 기회를 찾아볼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다고 봅니다.
교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소년소녀 가장을 도와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한국인이니까요. 마음이 더 가지 않을까요?."
그 면접은 10분 예정이었지만 5분 만에 끝났고,
저는 당연히 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1:8 경쟁률을 뚫고 붙었습니다.
내신도 평범했는데 붙었던 건,
아마도 그 생각이 제 안에서의 진짜 감정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20대부터 봉사나 기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어요.
하지만 막상 현실은 다급했고, 방법은 막막했습니다.
'나 하나도 여유롭지 않은데, 내가 무슨 기부야.' 하는 생각도 솔직히 들었고요.
그러다 어느덧 30대가 되었고,
이제는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기부는 '돈이 많아지면'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준비됐을 때' 시작하는 거라는 걸요.
그래서 작년, 용기를 내어 모임을 열었습니다.
생각보다 운영은 쉽지 않았어요.
서로 다른 생각과 온도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는 건
항상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긴다는 뜻이니까요.
그래도 그 모든 과정을 지나며,
서로의 얘기를 듣고 나누고,
연결되며 모임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1년에 네 번쯤 쉬어가며 모였고,
그렇게 모인 참여비가 90만 원쯤 되었습니다. (한 번에 5,000원씩 걷었거든요.)
기부처를 고민하던 중,
예전에 봉사활동을 하며 알게 된 '우리들원'이 떠올랐어요.
0~7세의 장애 아동들을 수녀님들이 돌보고 계신 곳입니다.
무작정 연락을 드렸습니다.
필요하신 물품이 있다면, 보내드리고 싶다고.
며칠 뒤 돌아온 리스트엔,
네뷸라이저, 석션 카테터, T형 키트 같은 의료용품들이 적혀 있었어요.
제가 또 최저가 검색의 달인 아니겠습니까.
90만 원으로 최대한 많은 걸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에
하나하나 가격 비교를 해가며 준비했습니다.
그 결과, 의료용품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마이키즈 음료까지 담을 수 있었어요.
수녀님과의 연락을 이어가는 동안,
오히려 제가 더 따뜻해졌습니다.
그분의 말투와 배려에서 진심이 느껴졌고,
그 마음이 저에게도 스며들었습니다.
물품을 전달할 땐 직접 찾아뵈었고,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음엔 봉사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레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제 작은 기부 이야기입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이 일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된 게 있어요.
하고 싶은 일을 실행에 옮긴다는 건
그 자체로 내 삶에 큰 선물이 된다는 것.
제가 보낸 물품보다,
그 과정에서 받은 마음이 훨씬 더 크다는 걸요.
기부는 저의 오랜 꿈이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될 꿈일 겁니다.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예요.
그걸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조금씩 '진짜의 나'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해야 할 일로만 채운 하루는 공허하지만,
하고 싶은 일로 채운 하루는, 오래도록 남더라고요.
앞으로 이 일을 정기적으로 해나갈 수 있을지 저도 확신하진 못하지만,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를 다독이며 가보려 합니다.
그리고 '앙가주망'에서 함께해 주셨던 분들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다음 꿈은,
대학교 면접 때 꺼냈던 그 다짐 그대로,
기아 아동들을 위한 봉사 활동입니다.
언젠가, 그 마음도 행동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