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2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나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봄이 오면 먼저 매화, 산수유가 꽃을 피우고 그리고 개나리, 진달래 이런 순서로 꽃이 핍니다. 3월 말, 4월 초가 되면 벚꽃뿐 아니라 온갖 봄꽃들이 만개하기 시작합니다. 모란은 봄도 한참 지나 대체로 5월이 시작되어야 피기 시작합니다.
시의 화자는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자의 봄, 즉 '나의 봄'은 '모란이 피기까지'이라고 한정을 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온갖 봄꽃이 아무리 현란하게 피어도 화자에게는 그런 꽃들은 안중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오직 모란이 피기까지는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화자에게 모란은 다른 어떤 꽃 보다 그가 좋아하는 꽃이거나, 아니면 그에게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기다리던 모란이 핀 날들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없이 갑자기 모란이 '뚝뚝' 떨어지고 만 날로 시는 급박하게 반전합니다. 꽃이 뚝뚝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꽃이 핀 것을 말하는데, 화자는 그렇게 고대하던 꽃이 핀 상황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은 시의 전체적 상황 전개에서 상당히 파격적으로 보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나요.
다시 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는 모란이 진 이후의 화자의 심정을 첫 2연과 끝의 3연을 제외한 나머지 8연에서 길고 자세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모란이 지고 나면 그의 한 해는 다 가고 말며, 삼백예순날, 그러니까 일 년 내내 섭섭해 운다고 말합니다.
'모란이 피기가지는'은 영랑의 대표 시로서 많은 평론의 대상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일관적인 평론의 초점은, 이 시의 화자는 일 년 중 오직 모란이 피기만을 기다리고, 모란이 지고 난 후의 절망감으로 나머지 한해를 온통 슬픔에 잠겨 지낸다는 진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에 모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란이 졌다고 해서 삶 자체를 다 잃은 것 같이 어떻게 삼백예순날을 울며 지낼 수 있는가, 그리고 모란의 아름다움이 삶을 포기할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평론가들은 먼저 영랑 시인을 '유미주의자'로 전제하고 이 시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중 몇 개의 평론을 보면 '영랑 시의 유미주의적 태도는 절정체험의 예외적인 순간을 지향하는 것'(김준오-비가적 세계와 순수자아) '모란은 순간 속에 존속하다가 소멸해야 하는 지상적 아름다움-삶의 심미적 도취의 순간을 열어주는 부서지기 쉬운 황홀이다.'(김흥규- 대표 시 대표평론) '모란의 찬란하고도 슬픈 미적 세계는 그가 바라는 이상경지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모란이 지면, 즉 이상세계가 무너지면 삼백예순날 내내 우는 것이다.'(문덕수 -김영랑 시의 두 가지 양상)
이렇게 위의 평론들을 관통하는 관점은, 시인을 '모란꽃만을 탐닉하는 특이한 유미주의자'로, 그리고 모란이 피는 것을 시의 화자에게는 '절정 미의 표상'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시 해석이 물론 잘못된 해석이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평론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을 보면 '절정' '예외적 순간' '도취의 순간' '황홀' '이성경지' 등의 지극히 비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여야 겨우 화자의 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의 화자가 기다리는 것이 단지 모란이 피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이러한 해석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현란한 평론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우리의 마음에 와닿지 않는, 좀 억지스러운 해석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이런 상황의 누군가가 있다면 이는 극도의 편집증 환자라고 해서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를 우리의 일상의 삶에 비추어 좀 더 자연스러운 해석의 길이 없는 지를 모색해 보려는 것입니다. 아울러 영랑시 전체에서 풍기는 서정성, 즉 그의 시가 우리에게 전하는 애틋함, 슬픔, 사랑, 그리움 등의 정서에 벗어나지 않는 시 읽기입니다.
시의 첫 연을 다시 읽어 보면 화자는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봄이 모란이 피기까지의 봄이라고 분명 말하고 있습니다. 시의 화자가 기다리는 것은 분명히 모란이 아닌 나의 봄입니다. 모란은 단지 기다리는 봄의 끝, 그러니까 봄과 여름의 경계의 꽃으로 설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모란이 졌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봄이 아니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화자가 기다리는 것은 봄이며, 무엇인가 다른 어떤 것, 즉 봄이면 있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시각으로 이 시를 읽어 보겠습니다.
화자는 모란이 핀 정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모란이 떨어진 날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란을 여읜 설움이 아니라 분명히 봄을 잃은 설움입니다. 여기서 '비로소'라는 말에서도 지금까지 봄의 끝자락까지 기다린 그의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화자는 모란이 떨어져 버렸음에도 그 꽃잎이 시들어 버리는 것 까지도 바라보며 무언가 미련을 가지다가 결국 모란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그의 보람이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보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대부분 평론가들은 모란꽃이 진 것을 보람이 무너진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는 '보람'이라는 말의 기본 의미, 즉 어떠한 '노력한 것에 대한 좋은 결과'라는 뜻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은 없으니, 단지 모란이 지는 것이 보람이 무너진 것이라면 이런 보람은 언제나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처음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람이 무너짐의 표현은, 무엇인가 절실히 기다리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기다리던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삶에서 가장 보편적인 기다림은 누군가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릴 때 시장 가신 엄마를 기다리고, 타향으로 떠나신 아빠를 기다리고, 이렇게 우리는 살면서 항상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여기 화자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 누군가는 봄이면 꼭 돌아오리라고 약속하고 떠난 사랑하는 임이 아닐까요?
이러한 가정으로 이 시를 읽어보면 이 시는 너무나도 쉽게 화자의 진술과 심정이 이해됩니다.
화자가 모란이 핀 상황에 대한 어떤 말도 없는 것과 모란이 떨어지고 그 잎이 시들어 자취를 감출 때 까지도 왜 모란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할 수 있는 한, 봄의 끝자락을 연장해 임이 오시기를 기다리려는 화자의 절절한 마음입니다. 모란이 지고 나면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웁니다.' 이 표현이 이해가 안 가는 분은 이제 아마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두 행입니다. 화자는 다시 봄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내년 봄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모란이 피는 봄의 끝까지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위의 평론가들은 이 표현을 '모란의 아름다움에의 환희와 그 소멸로 인한 슬픔의 표현'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답적 해석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화자의 이 표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비록 내년 봄에도 그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겠지만, 그러나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지금 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란이 다 지도록 연락 한마디 없는 사람이 과연 내년 봄에 온다는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시의 화자는 온갖 꽃이 피어 찬란한 그 봄도 슬픈 봄일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럼에도 기다려 보겠다는 애틋하고 애달픈 사랑의 표현을 이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과 함께 '시문학파' 동인이었던 박용철은 영랑 시를 평하여 '섬세하고 섧고 애틋하고 고웁고 쓸쓸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란이 피기까지는'도 지금까지의 일률적 평론에서 벗어나 영랑 본연의 시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다시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