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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설주에 귀 대이고

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3

       윤사월 

                 박목월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윤사월이면 양력으로 5월이나 6월쯤 됩니다. 봄의 끝자락으로 이제 한낮에는 꽤 더워지기도 하고 낮의 길이도 많이 길어집니다.

 소나무의 송화가루는 이때쯤 날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은 대개 5월 10일 전후로 집중적으로 날아다녀서 소나무 숲 가까이 살면 한 일주일 동안은 누런 송화가루 때문에 온 집안이 가루로 뒤덮여서 엉망이 됩니다. 이때 바람이라도 불면 하늘도 희뿌옇게 되어서 앞이 잘 안 보일 정도입니다.


 시 속의 장면은 꽤 깊은 산속입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아무도 살지 않는, 다만 외로이 산지기 집이 한 채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산속 꾀꼬리 울음소리가 얼마나 선명하게 잘 들릴까요.

 꾀꼬리도 이렇게 봄이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우리나라에 찾아옵니다. 이때가 짝을 찾을 때라 그 우는 소리가 더욱 간절하게 들립니다. 꾀꼬리 울음소리는 참 맑고 고운 휘파람 소리 같은 영롱하고 청아한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여기 산지기 집에 한 처녀가 있군요. 아, 그런데 이 처녀가 눈이 안 보인다고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잠깐 멈칫하게 됩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산속에 한 처녀가, 그것도 눈먼 처녀가 혼자 있습니다. 지금 처녀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녀는 문설주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이 처녀는 무슨 소리를 듣고 있을까요?

 

 이 시의 시적 흐름으로 보아서 눈먼 처녀가 듣고 있는 소리는 우선 꾀꼬리 울음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평론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꾀꼬리 울음소리는 바꾸어 말하면 '자연의 소리'이다. 그 자연의 소리를, 곧 '윤사월'의 봄의 소리를 '눈먼 처녀'가 엿듣고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고요에 싸인 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해 주고 있는 시이다."(송하선. 한국명시해설)

 위에 인용한 해석처럼, 이 시의 대체적 평론의 흐름은 '꾀꼬리 울음소리를 통한 눈먼 처녀의 간접적인 봄의 아름다움의 체감'을 노래한 것으로 감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월의 이 짧은 시에서 시인이 봄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시구를 굳이 찾자면 '꾀꼬리 울면' 정도입니다. 

 도리어 시 전체가 주는 느낌은, 새소리만 가끔 들리는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귀 기울이고 있는 눈먼 처녀의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정경이 시의 주된 묘사입니다.


 여기서 저는 눈먼 처녀가 귀대고 엿들으려는 소리는 꾀꼬리 우는 소리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고요한 시골 마을에만 살아도 새소리는 무척이나 잘 들리고 때로는 시끄러울 정도입니다. 하물며 깊은 산속에서 새소리를 들으려 기둥에 귀를 대고 있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꾀꼬리는 봄이 한창일 때부터 초여름까지 계속 울어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에서, 지금 꾀꼬리는 하루 중 언제쯤 울고 있다고 보이시나요. 이 시구는, 꾀꼬리도 '아니 왜 이리도 해가 길지?'하고 하루종일 우는 것도 좀 지친듯한 표현으로 들리지 않으신가요. 이렇게 여기서 이 시가 묘사하는 시간은 해 질 무렵 어디쯤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꾀꼬리 울음소리도 해 질 녘이면 좀 잦아들어갑니다. 이렇게 꾀꼬리 울음소리가 뜸하면 눈먼 처녀도 온종일 혼자 있다가 이제야 해 질 녘인 것을 느끼고,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릴까 하고 문설주에 귀를 댑니다. 산지기 아버지 발자국 소리가 들릴까, 혹은 먼 마을 장에 가시느라 아침 일찍 나가신 어머니가 오시는 소리가 들릴까 귀 기울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산지기 집이니 아버지는 계시겠지만 혹시 어머니는 안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시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어머니는 안 계실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 낮의 길이도 점점 길어지고 그러니 아버지도 더욱 늦게 오실 텐데 어머니까지 안 계시다면 너무 슬픈 운명의 처녀로 보입니다. 하루 종일 도대체 무얼 하며 지낼까요.

 한국 서정시 가운데 이렇게 짧은 시 행으로 서경 속 한 사람의 외롭고 슬픈 정경을 이처럼 담백하고 가슴 저리게 묘사한 시가 또 있을까요. 아마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이 시는 무슨 봄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이라거나, 꾀꼬리 소리를 통한 봄의 체감이니 하는 해석은, 시가 나타내는 고요하고 쓸쓸한 서정적 분위기와 너무 동떨어진 감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 옛날 크게 히트했던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우리나라 영화로는 처음으로 100만 관객을 넘긴 기념비적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결국 눈이 멀게 됩니다. 주인공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소리꾼으로 만들려고 어린 딸에게 판소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딸의 소리에 만족 못하던 아버지가 판소리 특유의 한 맺힌 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서 딸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그 딸의 이름이 '송화'입니다. 여기 '송화가루'날리는 산속 눈먼 처녀의 이름은 모르지만 서로 너무나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서편제'의 테마음악으로 김수철이 작곡한 '천년학'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대금 연주의 그 적막한 소리를 들어 보시면 '윤사월'의 눈먼 처녀와 '서편제'의 눈먼 '송화'가 겹처지면서 대금 소리가 더욱 애절하게 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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