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4
북치는 소년
김종삼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얼마 전 모 신문사에서 현역 시인 80명에게 한국 현대시 백 년의 세월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물어보았습니다. 1위와 2위은 백석 시인과 김수영 시인이 각각 차지했습니다. 그다음 3위는 누구일까요. 바로 여기 김종삼 시인입니다. 미당, 지용, 영랑, 목월 등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좀 의외이지 않나요? 물론 일반인을 대상으로 질문했다면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름 아닌 김종삼 시인의 시가 지금 시대의 시인들에게 그만큼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북치는 소년'은 시인의 대표 시의 하나로 거론되는 시입니다. 처음 이 시를 읽어 보시는 분은 시가 나타내고 있는 이미지가 뚜렷하게 올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시의 제목에 나오는 '북치는 소년'은 우리가 어릴 적부터 성탄절 시즌에 자주 들어온 캐럴이니 그렇다 치고, 그다음 시 본문에는 주어도 없고 서술어도 없이, 다만 '~처럼'이라는 부사절만 세 개가 병렬되어 있어 독자를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일면 시인이 좀 짓궂어 보이기도 하는군요.
이 시에 대한 평론을 찾아보면 의외로 많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시가 해설하기 어려워서 거나, 아니면 굳이 다른 말을 더할 필요가 없어서 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많지 않은 평론이지만, 대체적인 해석의 기조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은, 순수하고 눈부시지만, 현실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이라는 표현도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러한 평가와 유사한 김종삼 시인의 한 연구자의 글을 인용해 봅시다. "이 시의 제목에서 연상되는 북소리는 시인의 회상에 들어 있는 심상이지만 그것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며 어린 양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곧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화자에게는 이미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1)
다시 말하면, 가난한 아이에게 온 크리스마스 카드나 그 카드 속 양의 등에서 반짝이는 눈송이나, 이 가난한 아이에게는 어떠한 위안도 현실적 문제에도 도움이 되지 못함을 시인이 말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아, 우리의 김종삼 시인이 이런, 어찌 보면 시시하기 그지없는 뜻을 전하려고 이 시를 썼을까요?
시인은 평생에 200여 편의 시를 남겼지만, 그 외의 글은 아주 희귀할 정도입니다. 그는 평소에 신문기자나 누가 그를 만나고 싶다고 해도 좀처럼 허락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 인터뷰라도 할 양 찾아오면 도망가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의 시 세계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그의 직접 진술을 들어 보겠습니다.
"언덕길에서 교회의 종소리가 나의 이미지의 파장을 처 오면 거기서 노니는 어린것들과 그들이 재잘거리는 세계에 꽃씨를 뿌리는 정원사와도 같이 무엇인가 꿈꾸어 보는 것이다. 그 꿈 위에 놓아주는 한 떨기 꽃다발 '의미의 세계',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버릴 수 없는 시의 세계임을 나는 이러한 기회에 고백하고자 함에 있어 조금도 주저하고 싶지는 않다."(2) 또 그는 같은 글에서 "나의 의미의 백설 위에 노니는 이미지의 어린이들, 환상의 영토에 자라는 식물들, 그것은 나의 귀중한 시의 소재이다."
이렇게 그가 추구하는 시의 세계는 삶에서 보이는 순진무구한 어느 순간, 어쩌면 환상 속의 것과 같은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시로써 보이고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수한 '한 떨기 꽃다발'같은 의미의 세계는 바로 어린이의 세계임을 시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를 짓는 태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소위 '시작'이란 것을 해오면서 가지고 있는 한 가지 변함없는 소신은, 시란 그것을 보는 편에서 쉽게 써진 듯이 쉽게 읽힐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이상과 같은 그의 시의 세계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시작 태도를 바탕으로 위의 시를 읽어 봅시다.
첫 행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이 말이 주는 이미지는 상당히 추상적입니다. 어떤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러나 그다음에 나오는 '크리스마스 카드처럼'과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이라는 표현으로 이를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아이에게 배달된 크리스마스 카드도, 그리고 어린 양의 등성이에 떨어져 반짝이는 진눈깨비도, 그것이 '내용 없는' 그러나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시의 의미의 세계, 즉 흰 눈 위에서 뛰노는 어린아이의 세계는 사실 그 속에 어떤 내용이 있는 아름다움인가요. 그 순수함 속에 있는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일 뿐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란 위에서 시인이 직접 말하고 있는 '한떨기 꽃다발'과 같은, '백설 위에서 뛰노는 어린아이'와 같은, 어떤 내용도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름다움 자체에서 무슨 내용을 찾으려는 것은, '비너스' 조각상이나 ' 모나리자'의 그림에서 어떤 의미나 내용을 구하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일본 소설가도 있습니다.
"'로코코'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화려함 뿐이고 내용이 공허한 장식의 양식'이라고 정의되어 있기에 웃어버렸다. 명답이다. 아름다움에 내용 따위가 있으면 되겠는가. 순수한 아름다움은 언제나 무의미하고 무도덕하다. 반드시 그렇다."(3)
여기서 굳이 시 속의 부사구에 주어와 수식어를 붙여 보자면,
'우리의 삶 속에서,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양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내용 없는 그러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간도 있다.'는 이런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해 보는 것이 시인의 마음, 시인이 추구하는 시 세계에 합당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성탄절 캐럴에 맞추어 라파팜팜 라파팜팜 북을 치고 있는 소년에게서도 우리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어린 양의 등성이에서 반짝이는 눈송이를 바라보고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메말라 보일까요.
김종삼 시인의 짧은 시를 하나 더 읽어 보겠습니다.
조선 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장문 2' 전문
이 시도 어떤 커다란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슬픈 삶 속의 아름다운 순간을 절제된 말속에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김종삼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한 편의 시 속의 이중적 이미지가 위의 두 편의 시 속에서도 분명히 보이고 있습니다. 즉, 시 속의 '아름다움'과 또한 '슬픔'의 동반적 이미지의 표현입니다. 두 시편의 '가난한 아이'의 등장과 함께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슬픈 정경임이 분명합니다.
위의 두 시를 생각하면서, 김종삼 시인 자신은 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는 사랑의 손길이 오고 가는 아지랑이의 세계처럼 시인의 안막에 내려와 앉은 나비인지도 모르는 것이다."(4)
1. 김화순. 김종삼 시 연구. 도서출판 월인 2011. 41쪽
2. 김종삼. 한국전후문예시집. 신구문화사. 1964
3. 다자이 오사무. 내 마음의 문장들. 시와 서 출판. 2020. 70쪽
4. 김종삼. 위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