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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8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1960-1989). 2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것만으로도 그는 분명 천재 시인일 것 같은 시인, 우리가 아는 데로 그는 문학적 천재성을 타고 난 재기 넘치는 젊은 시인이었습니다. 1985년 중앙일보 기자로 있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정식 시인으로 등단. 그리고 4년 후 사망한 또 한 사람의 한국의 비운의 시인입니다.      

  시는 첫 행부터 아주 단도직입적 진술로 시작합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그리고 바로 또다시 단호히 선언하듯 말합니다. ‘잘 있거라’라고요. 여기 이 시의 화자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요? 예, 지금 이 화자는 사랑을 잃고 그 사랑하던 사람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했던 너무나 짧았던 밤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를 보며 혹 그 사랑의 안타까운 결말을 예감했을 추웠던 날들, 그리고 사랑하던 사람의 옆얼굴을 희미하게 비춰주던 촛불들, 첫사랑의 그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허둥대고 망설임 끝에 어쩔 줄 몰라 흘리던 눈물들, 때로는 그와의 미래에 대해 가졌던 장밋빛 열망들을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들은 이제 그 사랑을 잊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라고 할까요,  그 모든 것을 써서 책상 위에 두고 그리고 이제 문을 잠급니다.     

 여기서 ‘나’ 즉 이 시의 화자는 문을 안에서 잠그고 가엾은 사랑과 함께 스스로 빈집에 갇힌 건가요, 아니면 이제 이 모든 것을 빈집에 두고 문을 잠그고 떠나버리는 것인가요. 

    

 기형도의 시 중에는 그의 어릴 적 기억을 바탕으로 쓴 ‘엄마 생각’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여기서는 ‘빈방’이 나옵니다. ‘찬밥처럼 방에 담’ 긴 유년의 외로움 속에 엄마를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으로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소년과, 이제는 사랑을 잃고 ‘빈집’에 스스로를 가두는 성년의 시인이 오버랩되지는 않으신가요? 

  그리고 또 여기 문을 잠그는 화자의 모습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절망으로 앞도 잘 가리지 못하는 듯한 장님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려는 사람의 그것보다는, ‘가엾은 내 사랑’과 함께 이 세상의 것들과 스스로 격리되어 그 집에 같이 갇혀 있으려는 모습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요. 이제 그 ‘집’은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버려 정서적으로는 텅 빈 ‘빈집’이 되어 버린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시를 위와는 다르게 해석해 보겠습니다.

  먼저 '빈집’이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라야 ‘빈집’이 되니 당연히 그 이루지 못한 사랑의 모든 추억들을 그 ‘빈집’에 두고 떠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다’는 행위는 그 모든 기억을 그의 뇌리 속에서 다 쏟아서 잊어버리고 그 추억이 쓰인 책을 두고 떠나려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잘 있거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는 이제 이 모든 것과 작별을 고하며 문을 잠그고 비록 장님처럼 비틀거리더라도 떠나야 하지 않을까요.

 자 이제 여기서 결론을 내려야겠군요. 그는 빈집에 모든 추억을 두고 떠나는 가요, 아니면 그 속에 같이 갇혀 세상과 단절하려는 걸까요. 


 여러분은 이 시를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한번 서로의 견해를 말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여기에서 무슨 정답을 찾기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이렇게 시를 읽으면서 우리  각자가 시 속으로 들어가서 이런 길 저런 길을 탐색해 보는 것이야말로 시를 읽는 진정한 재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다의성(多義性)의 문학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사실 화자가 문을 안에서 잠겄거나 밖에서 잠겄거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을 잃은 한 사람의 마음을 같이 느끼고 공감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기형도 시인은 시 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멋있는(?) 말을 남겼군요.

     “시 쓰기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해야 하는 ‘불행한 쾌락’이다”(1) 

         

1. 박해현. 기형도의 삶과 문학. 정거장에서의 충고. 문학과 지성사. 2009.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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