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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시보(espressivo), 한 잔 하실래요?

에스프레시보에 아파시오나토 샷을 더하다

by 비플렛 쌤

에스프레시보, 한 잔 하실래요?

누군가 음악과 커피를 함께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미소 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용어 중 하나가 바로 에스프레시보(espressivo)다.

악보 위에 그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나의 몸과 마음은 스르르 이완되고,

연주는 조금 더 따뜻하고 촉촉해진다.

슬픈 선율은 더 슬퍼지고, 아름다운 선율은 더 눈부시게 다가온다.

마치 음악 위에 마법 가루를 솔솔 뿌린 듯한 그 감각.


에스프레시보는 말한다.

“충분히 느끼고, 감정을 담아, 표현하라.”

틀에 갇히기 쉬운 고전적인 구조 속에서도,

그 한 단어는 잠시 틀을 유연하게 만들어 준다.

엄격했던 곡조가 숨을 쉬고, 단단했던 리듬이 부드러워진다.

어떤 곡에서는 자주 반복되며 그 감정의 결을 따라 이끌어주기도 한다.


에스프레시보(espressivo)는 이탈리아어 esprimere에서 유래한 말로,

‘표현하다, 짜내다'라는 뜻을 가진다.

음악에서는 이 표현이 감정을 담아, 내면의 정서를 꺼내듯 연주하라는 의미로 쓰인다.

생각해 보면 에스프레소(espresso)도 같은 어원에서 왔다.

진한 향과 풍미를 압축 짜낸 작은 한 잔의 농축된 맛...

그처럼 에스프레시보 역시 감정을 꾹 눌러 담아
짧지만 깊은 울림으로 전하는 음악의 언어다.

커피의 ‘에스프레소’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어쩌면 자연스레 ‘에스프레시보’의 느낌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메리카노를 더 좋아한다. 묵직하면서도 여운이 긴 그 맛처럼.)


나에게 음악 용어계의 유일한 압박감을 주는 단어가 하나 있다면,

그건 단연 '아파시오나토 (appassionato)'다.

뜻은 '열정적으로,

강렬하고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정서를 실어,

크게, 길게, 감정을 이글이글 끌고 가라는 무언의 압박


베토벤 소나타 23번의 부제로도 알려진 '열정'. (참고로, 이 부제는 후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 단어를 마주하면 이상하게 위축된다.

내 안에 열정 세포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일까.

심지어 그 단어는 포르티시모(fortissimo) 같은 악상 기호와 나란히 등장해,

“크게, 그리고 불타오르게!”라고 외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부디 한 번 발음해 보시라. “아. 파. 시. 오. 나. 토.”

그 소리를 천천히 따라 읊는 것만으로도

입술 끝에서부터 열정의 불씨가 피어오르지 않나요?

연주하는 사람에겐

몸의 힘을 사용한 격렬함, 내면의 격정,

그리고 그것을 견디며 시간의 호흡으로 끌고 가는 내공까지 요구한다.

너무나 입체적인 요구에, 나는 종종 숨을 고르게 된다


그런데 며칠 전, 학생 악보에서 아주 생소한 조합을 만났다.

“espressivo ed appassionato”

내 최애와 최난이도의 콜라보.

이 조합,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에스프레시보인데 아파시오나토 하게 하라니, 이건 무슨 조합인가.

에스프레시보를 불태우듯 연주하란 건지,

아니면 감정을 담아 한 프레이즈를 열정으로 밀어붙이라는 건지…

도무지 헷갈리지만, 왠지… 알 것도 같다


감정이 충분히 스며든 열정은 억지스럽지 않다.

충분히 느끼며 몰입한 상태에서의 아파시오나토는

더 이상 “세게 쳐야 하니까”가 아니라,

“이 감정을 나누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울림이 된다.


그래서 오늘은,

아파시오나토(appassionato)가 예전처럼 거대하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내 몸이 절로 릴랙스 되는 에스프레시보와 함께하니,

그 열정조차 내 음악의 일부처럼 다가온다.


눈이 시리게 따뜻한 그 순간,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에스프레시보 한 잔, 그리고 아파시오나토 한 모금.”

이 조합, 묘하게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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