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 한강 / 문학동네 (2021)
[My Review MCMLXXIX / 문학동네 20번째 리뷰] 제주 4·3 사건의 진실은 아직도 요원하다. 짙은 안갯속을 헤매듯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 앞에서 '근거'를 내놓으라며 다그치는 사람들이 맞서는 형국이다.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은 이렇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법적 정의'에 기대어 합법적인 판결로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독재정권의 횡포와 초강대국 미국의 압박 아래 어쩔 수 없이 희생된 사건이니,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다짐을 받겠다는 국민들의 열의를 그동안의 정부는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그나마 '진보정권'이라 불리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서는 미약하나마 진상조사를 진행하고서 국가차원의 사과를 받긴 했지만, 이로써 모든 원한이 해소 되었을까? '국가'가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학살한 사건을 그 어떤 명분으로 일거에 해소할 수 있겠는가?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45분경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령 선포'를 느닷없이 발표하였다. '포고령'에는 정치인들의 일체 정치행위를 금지하며, 국회를 봉쇄하고, 선거관리원을 점거하고, 전공의 파업을 전면 금지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이에 국민들은 국회로 달려갔고 계엄군과 맞서 민주주의 질서를 지켜냈다. 그사이 국회의원들은 담장을 넘고 경찰의 제지를 뚫고 의사당 안으로 들어가 '비상계엄 무효'를 이끌어냈고, 새벽 5시즈음 윤석열은 '무효 선언'을 발표했다. 한밤의 헤프닝으로 끝나야 마땅하고, 윤석열은 '내란우두머리'로 즉각 파면되어 국정 안정을 최우선으로 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법치국가' 대한민국은 이 모든 과정을 법적인 판결로 심판을 받겠다며 '헌법재판소'에 모든 공을 돌려버렸다. 국회는 연이은 특검과 탄핵소추로 국정은 마비가 되었고, 행정부는 '거부권 남발'과 '적법절차'를 따지며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심각성은 망각한채 그저 '위법'이냐 아니냐, '위헌'이냐 아니냐만을 따지겠다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이제 모든 공은 '사법부의 판결'만으로 해결하겠다는 시간과의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그 사이에 정부와 국회는 각각 '여론전'에 돌입했고, 국민들은 여당과 야당 편으로 갈라져서 첨예한 갈등만 양산하게 되었다. 흡사 '대선경쟁'처럼 말이다. 외신들은 이런 혼란속에서도 집회와 시위가 평화적이라며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했지만, 이런 평가가 무색하게 '서부지법 폭동사건'이 벌어지면서 단 한 방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급락하고, 그동안의 평가는 버블이었으며 다시금 '저평가'할 수밖에 없으며, 성급한 평가였다며 조심스런 관망 모드로 후퇴하고 말았다. 여기에 더불어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다. 트럼프발 관세정책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도, '수장 공백사태'는 해결기미도 없이 국론은 분열되었고, 이대로라면 윤석열이 복귀하든, 새 대통령이 당선되든 불신과 혼란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다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원하는 형국은 또다시 대한민국에 '독재자'가 등장할 가능성만 높일 뿐이다. 제주도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도 '이승만 독재정권'이 국론분열로 인한 혼란을 잠재우고 반공정책을 지지하는 미국의 압박을 이겨내고 경제지원을 이끌어내는 문제까지 일거에 해소하려는 '극약처방'이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러한 '과거사'를 알게 된 전세계 선진국들은 이러한 대한민국의 문제를 대한민국이 어떻게 해소하려는 것인지 지켜보겠다며 물러선 셈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선택만 남은 셈이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윤석열 복귀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는 자신과 마누라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 '또 다시 계엄령'을 선포하고도 남을 위인이다. 설령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는다고 해도 국정운영에 대한 '무능력'으로 일관한 탓에 결국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도 못하고 국정파탄을 일으킬 것이 확실하다. 그럼 윤석열이 파면되고 새 대통령으로 현 지지율 1위인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까? 지금의 '국론분열'된 상황에서 반이재명 측에서 벌이고 있는 '사법리스크'로 계속 국정을 흔들고 폭동도 불사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쪽 결론으로 나더라도 대한민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결말밖에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사법부의 판단'이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로 정의를 세울 수 없는 지경에 다달았다. 어떤 판결이 나오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승복한 뒤에' 벌어질 민주주의 질서 회복이다. 폭력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필요하다. 어차피 정치인은 다 그놈이 그놈이다. 정치인 한 명 바뀐다고 대한민국이 바뀌지는 않는다. 허나 국민이 바뀌면 대한민국은 바뀐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는 '원칙'만 지켜진다면 법은 어떤 법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문제는 국민들이 질서회복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가 관건이다. 정치인 한 명의 독단으로 온나라가 흔들리고 말 거라면 차라리 그런 국민들은 학살 당해도 싸다. 하지만 촛불을 들고 응원봉을 들고 단합된 '한 목소리'를 낸다면 독재자라도 물리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국익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엄령이 떨어지자 '계엄군'이 총 한 방도 쏘지 않았다. 그리고 국민들은 온몸으로 계엄군을 막고 총부리조차 겁내지 않고 맞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계엄령이 해제된 것이다. 이게 '한 목소리의 힘'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뒤에 벌어진 '정부여당'과 '사법부', 심지어 '헌재'까지 어땠나? 대한민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최적의 판결'을 내린 것이 있던가? 정부여당은 헛소리로 일관하며 국정마비의 원인을 '야당탓'으로 돌리고, 사법부는 '적법절차'를 따지며 판례에도 없는 괴상망측한 논리로 내란우두머리를 수사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말았다. 헌재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서 '헌법해석'에 골머리를 썩고 있느냔 말이다. 당신들의 오판 하나로 대한민국에 '지옥문'을 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정녕 국민들을 '제주 4·3 사건 당시'로 되돌리고자 한단 말인가?
서론이 길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위의 내용과는 사뭇 다른 줄거리가 담겨 있다. '죽은자'가 '산자'에게 들려주는 간절한 소망만 담겨 있을 뿐이다. 그 소망은 '살아달라'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었더라도 죽고 난 다음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으니, 반드시 살아서 하고픈 말을 다하거나 하고 싶지 않은 말이라면 때를 기다리라고 전하고 있다. 손가락이 잘리는 고통보다 '손가락의 신경을 되살리는 과정'이 더욱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것은 '신경세포'를 일깨우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다친 부위를 찌르고, 바늘을 꽂았던 곳의 상처가 아물면 또다시 찔러 피를 내서 계속 '상처인 채'로 남겨두어야 신경이 완전히 되살아나는 혹독하고 끔찍한 과정이다. 그 극심한 고통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할 수 없으니 '간병인'이 주기적으로 찌르고 또 찌르면서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도록 관리해야만 한다. 언제까지인지는 분명하다. '신경'이 제자리를 찾고 다시 원래의 '감각'을 되찾을 때까지 반복할 것이다.
인선이 목공일을 하다가 전기톱날에 손가락이 짤리는 사고를 당한 것은 '느닷없이' 찾아온 불행이었을 것이다. 산간마을 속에서 홀로 깊숙히 숨어들어 살고 있었으니 병원에 실려가 응급조치를 받고 수술이나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을 것이다. 까딱했으면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허나 손가락이 잘린 뒤에 치료과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평생 불구로 살며 '손가락'을 포기한 삶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온전한 '손가락'으로 되돌리려 끔찍한 고통을 참고 또 참아내는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는 삶이다. 이쯤하면 '손가락 절단 사고'가 무엇을 상징하고,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 인선의 부탁으로 경하는 한밤중에 '앵무새 한 마리'를 살리려 제주도로 날아간다. 그리고 무릎까지 쌓은 눈을 헤치고 인선의 외딴집으로 들어가 '인선의 과거'와 마주한다. 그곳에서 경하는 인선의 영혼과 '대화'를 하는 묘한 상황에 처하지만, 끝내 성냥불 하나에 온 희망을 다 거는 간절한 소망을 말한다. '살아 달라'고 말이다. 죽지 말고 살아달라고 간절히 소망한다.
제주 4·3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구금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행불자'가 되었단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을 추적할 수 없게 된 사람들 말이다. 분명 '여기'서 '저기'로 보냈다는데, '저기'에서는 '온 적'도 없다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국민이 사라졌는데도 이 나라는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그런 취급'을 받아도 괜찮다는 논리로 그냥 밀어붙인 것이다. 그렇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고, '산 사람'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엄혹한 시절을 보냈다. 이제 대한민국도 갈림길에 선 것이다. 살았든 죽었든 '할 말'이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지, '듣기 싫은 말'을 할라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도 족치고서는 '법치주의'의 뒤에 숨어서 '사법정의' 수호에 매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 것인지 말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환부가 훤히 드러났다. 그 환부에 '제 신경'이 되돌아 올 수 있게 찔러서 피를 흘리는 일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게 싫으면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만 한다. 그조차 싫다면 우리의 아픈 부위를 찌르고 또 찔러서 피를 흘리게 만들어야 한다. 피의 복수, 정의의 횃불을 높이 들고 폭력을 행사하자는 말이 아니다. 99.9% 사기꾼이 틀림없는 정치꾼에게 일침을 가하고,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라고 계속 찔러줘야 한다. 무뢰한 저들에게 '계몽령' 소리를 듣고도 참고 아무런 깨우침을 얻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격이 없는 셈이다. 정치를 제대로 못하면 국민들이 참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줘야 한다. 폭력이 아닌 '한 목소리'로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일궈온 대한민국인데 이렇게 한 순간에 병신꼴을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참을 수 없다고 말하라! 자랑스런 대한민국과 영원히 작별하지 않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