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그 바람

-기억하려는 남자, 잊으려는 여자 4화

by 금희

아배는 측은한 눈빛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화를 내며 마구 욕을 퍼붓는 어매와는 달랐다.

아마 아배는, 세상에 계집아이 하나 덜렁 뱉어놓고는 그저 하릴없이 늙어가는 자신의 처지가 안쓰러웠는지도 몰랐다.
거기다 세상 밖을 꿈꾸는 듯, 감감히 딴 세상에 빠진 딸이라니. 혀를 찰 만도 했다.

지영의 아배는 요즘, 여름 평상에 멍하니 앉아 담뱃대만 뻐끔대곤 했다.
섬 안에 소문이 돌기 전에, 어떻게든 지영의 혼사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골몰하며.
"아이고, 애가 저 모양인데, 어느 총각이 댈고 가겠소? 댈고 가는 것도 지 정신 아니것제."
성난 어매의 짜증에도, 아배는 말없이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그날, 바람이 조금만 더 불었더라면,
아배는 그 낯선 길손을 붙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아랫재 사는 ㅇㅇㅇ입니다."
담뱃대를 털어 내려놓던 아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누구시더라?"
"처음 뵙습니더. 여긴 첨 입니더."
눈을 끔벅이는 아배 곁에서 어매는 부엌으로 슬며시 몸을 뺐다.
"배 수리를 하게 됐는데, 며칠 걸릴 거라서… 여기서 잘 수 있다고 해서 말입니더."
"그럼, 그러지. 다 우리 집에서 묵어가요. 방은 많으니까. 그래, 혼자 묵으려고?"
"예, 지 혼잡니다. 한 사나흘이면 될깁니더."
부엌에 숨어 귀를 세우던 어매는 오랜만의 길손에 뛰어들 듯 들어가 손님방 채비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아배는 어매와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의 눈엔 낯선 탐색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곧 막걸리병이 그들 앞에 나뒹굴었다.
방 하나 빌려줘 받을 돈보다 더 나가는 술상에, 어매는 입을 삐죽이며 수시로 눈을 흘겼다.
손님 대접하라는 아배의 성화가 반가울 리 없었다.

사내 역시 처음엔 갸웃했지만, 이내 술잔을 받았다.
술을 핑계로 무슨 해코지를 할 눈치는 아니었고, 누가 봐도 자신의 행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을 터.
게다가 하루가 길고 무더웠다. 너무도.
배 밑바닥이 허무하게 터져 낯선 섬에 발이 묶인 이 상황은 그에게도 갑작스러운 수난이었다.
그런 날엔, 마른날을 축일 막걸리 한 잔이 은혜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아배는 사내가 한 말 중 오직 세 마디만 귀담아들었다.
조실부모. 노총각. 집.
그거면 족했다.
그의 손은 끊임없이 술을 따랐고, 눈빛은 바삐 움직였다.

이윽고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이제 그만 마시겠소"라 할 즈음, 어매는 아배의 의중을 눈치챘다.
속이 훅 내려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뿐인 자식인데.
남편이 딸의 혼사를 이런 식으로 치르려는 마음이 아렸지만, 아낙네가 뭘 어쩌랴.

비틀거리는 사내를 부축하며 아배는 문 앞에 선 어매를 향해 눈짓했다.
문을 열라는 신호였다.
머뭇거리는 어매에게 아배는 눈썹으로 위협을 보냈고, 마침내 방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지영이 고개를 돌렸다.
사내를 방에 눕히고, 아배가 나서려는 찰나 지영도 함께 따라 나왔다.
그러자 아배는 그녀를 다시 방 안으로 밀어 넣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덥고 눅진한 공기.

그 앞에 누운, 술기운에 잠든 사내. 지영은 문득 그 앞에 멈춰 섰다.
지영은 그의 숨소리가 매미 소리에 묻히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상관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젊은 사내들은 죄다 도시로 떠나버리고,
섬에는 혼기가 지난 여인네들만 남아 속을 태우는 형국이었다.

지영이 여인의 모습을 숨기지 못하게 된 그 무렵부터,
아배의 혼인 집착은 점점 그녀의 삶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살갑게 웃으라 했고, 비싼 분을 사주어 얼굴을 곱게 단장시켰으며,
형편에 지나치게 고운 옷까지 입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지영에게 어떤 삶을 원하는지 묻지 않았다.
당연한 여인의 삶을, 물어 무엇할까.

지영은 천천히 이불을 끌어당겨 누웠다.
매미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고,
그제야 사내의 숨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그 숨소리를 들으며,
지영은 눈을 감았다.


그 밤,
조용히 닫힌 문뒤로
섬마을의 긴 여름이 한 뼘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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