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브의 섬
좌표 없이 떠다니는 부표.
길을 잃은 채 물결 위를 부유하는 그 어딘가.
햇빛 아래에서 나의 반쪽은 점점 작아지고, 어둠 속에서 길어지기를 반복. 어느 날 서로의 얼굴을 잊었다.
파도가 덮칠 때면 삼켜지지 않기 위해 둥글게 몸을 말아 자궁 속으로 숨어들며 쌕쌕거렸다. 그렇게 본능만으로 살 자리를 찾아갔다.
파도는 직면할 수 있었다. 강하게 부딪히고, 피하고, 숨으면 됐다. 하지만 잔잔한 물결은 끝없이 흔들었다. 울렁이며 밀려든 물살은 뒤로, 더 뒤로 멈춤 없이 조용히 나를 덮었다. 언제 덮칠지 모를 파도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시간이, 그 고요가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 안에서 더 깊은 무력감과 신체 반응으로 , 나는 가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휘청이는 정신으로 무수한 별들의 낙화를 받아냈다. 바다 위로 쏟아진 별들이 뜨겁게 반짝이며 가라앉자, 기억은, 그 불길 속 어느 시점에 표류했다. 멈춘 기억은 늘 한 곳으로 돌아간다. 교실, 그리고 경리.
그날 조회는 예사롭지 않았다. 날이 선 출석부는 교실 벽에 꽂히며 여기저기 명중했다. 그리고 다음 과녁은 지각생을 향했다.
"드르륵."
이유를 알 수 없는 담임의 성난 목소리에 모두가 진땀을 흘리며 숨을 자리를 찾아다녔다. 공교롭게도, 그 불안은 적중되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일제히 60명의 눈이 뒷문을 향했다. 순간 애매하게 돌던 공기가 싱크홀처럼 가라앉았다.
"지금이 몇 신데, 왜? 수업 마치고 오지?"
경리는 항상 어색했다. 긴장하면 웃음이 먼저 나왔다.
"웃어? 너 이리 나와. 앞으로 와!"
담임 손에서 지휘봉이 하늘을 갈랐다.
찰싹, 찰싹… 찰… 싹…
칠판에 두 손을 뻗고, 엉덩이에 빨갛게 낙인이 찍히면 경리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울렁이는 속을 붙잡고, 토(吐)를 했다.
눈을 뜨면 양호실의 하얀 커튼 아래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햇살 아래 숨어서 나는 경리를 떠올렸다.
경리는 밤마다 미싱공장에서 일을 했다. 새벽까지 재봉틀을 돌린 뒤, 겨우 눈을 뜨고 부스스한 얼굴로 등교하는 아이였다. 실밥이 붙은 교복, 감기지 않는 눈. 그런데도 조퇴하거나 결석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부모님이 안 계실까? 혹은 주변에 어른이 없을까? 수많은 물음을 난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번번이 담임의 회초리를 눈물 한 방울 없이 받아내는 경리가 더욱 안쓰러웠다. 윤리를 가르치는 담임의 윤리는, 어디에 있었을까.
점점 교실보다는 창밖 운동장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고, 나를 따라오는 시선 속에서 경리를 만났다. 우리는 낮과 밤을 이어 서로의 반쪽에 기대어 이브의 섬을 찾아다녔다. 무겁게 시간을 이고 걸어가는 중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그림자를 따라갔다.
못다 푼 시간은 숙제로 남고, 답을 찾지 못한 기억은 '초와 분' 안에 갇혔다. 나는 '자조(自嘲)의 독'을 마시며 성장했다.
-나를 이어주는 숨결은 강하지 않아도 조용히,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수많은 글들을 담아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끝나기 전엔 끝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