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좌판위의 남자

by 금희

잊으려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기억하려 한다.
좌판 위에서, 말하지 못한 그날을 되씹는다.


넋두리는 그만하자. 징징 거리는 자아비판도 멈추자. 누가?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가던 길을 되돌아와 인생의 패배자라 자칭하는 50대의 눈물을 받아주려고 돈을 지불하겠는가?

좌판 위에 늘어 뜨린 , 쭈글쭈글 비틀린 책의 표지에도 , 방금 입다가 벗어 놓은 것 같은 실밥 터진 색 바랜 청바지에도 선명하게 표가 나는 눈물자국은 뭔 재주로도 씻겨지지 않고 , 그나마 길손의 발을 잠시나마 멈출법한 물건은 사실, 더벅머리에 쩐내가 혈관까지 스며든 나다.

돈을 얼마를 준다고만 한다면야 , 그 후에 일어날 일은 제쳐놓고 , 팔 한쪽이라도 잘라주겠노라 호언 장담 하겠건만, 이날 이때까지 날 위해 돈을 쓰겠다는 놈, 년을 포함해서 , 본 적이 없다.

어찌 이리됐을꼬? 넋두리와 징징거리기를 멈추기로 했으니 내 입으로 말하진 못하겠고, 나도 낯짝이란 게 있으니.

어찌할꼬? 꾸르륵 창자가 들끓으니 뭔 수를 내긴 해야 구녕을 막을 터인데, 동냥으로 한 끼 때우려면 해가 질 거야.

아, 그렇지! 한땐 글깨나 쓴답시고 긁적인 자서전이 여기 어디쯤 있을 텐데... 쪼금만 있어 보세. 내 금방 찾을 테니... 여기 책더미 속에 숨어 있을 것이네. 뭐? 니까짓게 뭔 자서전이냐고? 자서전을 100층 빌딩 가진 놈들만 쓰라는 법이 있나? 그리 생각하면 애당초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살던 대로 살고 , 나가 불쌍하면 지폐 한 장 놓고 가소.

1988년 08월 15.

술자리에서 현수를 만났다. 뜻밖이라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는 나와 달리, 현수의 얼굴엔 조금의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저 새끼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분노에 휩싸인 나는 몸이 굳어지며 숨이 턱턱 막혀,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으면 119 구조를 불러야 할 판이었다.

'드르륵, 끽.'

뒤로 밀려 나온 의자가 더럽게도 눈치 없이 소리를 내며 기어코 바닥에 자빠지자, 일제히 동창들의 동태 눈깔들이 내게로 쏠렸다.

황급히 의자를 제자리에 박아두고 주섬주섬 담배를 입에 물고 나가려는데, 하필이면 현수 놈이 내 팔목을 잡아 세웠다.

"박태석, 담배... 거꾸로 물었다."

순간 좁은 줄 알았던 술집 안이 메아리치며 웃음소리가 닫힌 문 밖까지 꼬리를 달았다.

술자리가 어지러웠다. 그 많은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붙어 있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현수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나는 잠시 문가에서 망설였다. 불 꺼진 창밖을 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는 척했지만, 사실 한 모금도 들이마시지 못했다.

불을 다시 붙이려는 순간, 현수가 다가와 담배를 낚아채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말없이 발로 비볐다. 마치 나를 비웃듯이.

그는 웃었다.

"그날 일... 너 아직도 생각하냐?"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오래된 무언가가 다시 들끓는 건지 , 손끝이 얼어붙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날. 그날이라니?
어떤 날?

네가 경리 궁둥이를 만지고 울린 날?
내가 니 행동을 못 본 척 지나친 날?
.... 내가 선악과를 먹은 날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 얘기, 여기선 하지 마라."
현수는 다시 소리없이 웃었다.
"그러니까,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얘기. 그럼 우리, 끝난 게 아니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젊은 여자를 데리고 외제차에 올라탔다. 비열한 웃음이 굉음을 냈다.

‘개새끼.’
나의 말은 소리 없이 입술 안에서 울렸다.
다시 주워 문 담배에선 꺼질 듯 말 듯 불이 깜빡였다.

2016.04.17

현수는 내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야, 어째 커피도 너 같냐? 밍밍한 게..."
그는 나의 어깨를 탁 치며 멀어졌다.

2016.06.03

담배를 현수에게 빼앗겼다.
내가 뺏긴 것은 담배일까...?

2017.01.10
나는 왜 현수를 불렀을까?
조금만 지나면 면허를 갱신할 수 있었는데 나는 왜 또 음주 운전을 했을까?
와이프와 애들을 볼 낯이 없다.
내가 이런 인간이었나?

현수는 내가 무면허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두렵다.

2019.12.01
보증

2020.04.22
경고장

2021.03.17
지방 법원. 강제집행 통지

2021.07.02
가출... 아내는 말없이 나갔다.

2022.02.11
소주 한 병.
양은 냄비.
첫 좌판.

2022.09.01
"이거 얼마예요?"
모른다. 그냥 가져가라.

'스르륵 ',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에 태석은 고개를 들었다.
"이거... 소설이죠?"
고등학생이 자서전이라 쓰인 공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태석은 대답 대신
조용히, 아주 잠깐 웃었다.

나도... 소설이었으면 좋겠다.

학생이 버스에 앉아 태석의 책장을 펼쳐 들자 메모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석 씨, 나는 당신이 왜 망가졌는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직접 말해주길 바랐죠.
내가 먼저 물어야 했을까요?'

-당신의 아내, 진이-

#선악과 # 망각 # 기억 #원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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