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그날이었고, 그때였을까..
젊었을 적엔 자식 입에 뭐라도 넣어줘야 했으니 매일이 고단했고 힘들었다. 이제야 이제 자식 두 명을 다 키우고 한 명은 독립을, 한 명은 결혼을 한 후 쉴 때가 되었는데 엄마는 쓰러졌다.
우리 집은 참 많이 가난했다. 가난은 그림자와도 같아서 언제나 나를 쫓아다녔다. 뿌리칠 수도 없었고, 가난으로 유년의 기억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들처럼 한순간에 망해 갑작스러운 가난이 아니었다. 최초의 기억부터 엄마와 아빠는 항상 돈문제로 싸웠고 우리 집이라 부를만한 곳도 없었다. 가난에 쫓겨 많은 이사를 했어야 했고, 화장실이 집안에 있는 집에서 사는 게 소원이었다.
엄마는 항상 바빴고 아빠는 한량이었다.
네 가족이 다 함께 산 기억이 많지 않다. 언제나 엄마나 아빠 둘 중 한 명은 없었다. 어릴 때 궁핍은 내 탓이 아니었기에 왜 나는 이런 집에서 태어났는지 불만이었다. 이 모든 게 몰래카메라이고 사실은 부잣집이라는 쓸데없는 상상도 많이 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는 죽고 싶다고 일기에 썼다가 엄마한테 혼났다.
엄마가 자식 둘을 낳고 항상 밀리는 월세를 벌어야 했던 그 나이를 내가 지나면서 엄마의 인생을 생각해 보았다. 엄마 역시 가난했다. 그래서 중학교도 못 가고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미싱을 시작했다. 아빠를 만나고 나를 낳고 동생을 낳고 시간이 지나도 가난했고 아빠와 이혼을 하게 된다.
아빠 표현으로는 자식 버리고 도망갔다. 하지만 엄마는 집을 나가서 친구집, 동생집을 전전하며 빚을 갚아갔다. 엄마는 이혼하자 해도 이혼도 안 해주고 그저 셋이 살도록 놔두기라도 했으면 나, 동생 데리고 어떻게든 살았을 텐데 일도 잘 못하게 하니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엄마가 짐을 다 싸서 집을 나갔던 그다음 날.
딸 등굣길에 서서 딸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던 여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얼마나 기다렸는진 모르겠다. 그땐 휴대폰도 없었고, 난 삐삐조차 없었다. 아빠랑 잠깐만 살고 있어 데리러 올게 하며 삐삐번호를 나에게 알려줬다. 아빠에겐 알려주지 말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아빠 말대로 자식 버리고 간 건 아니었다. 엄마와 나만의 비밀. 그게 내 나이중학교 1학년, 엄마 40 일 때였다.
엄마가 언젠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지하 셋방 살 때 XX(동생) 생일 때 케이크 사달라고 우는데 밖에 집주인이 월세 달라고 서 있으니 눈치가 보여서 사러 갈 수가 있어야지
라는 말을 했다. 매번 지하셋방에 살았던지라 어느 집을 말하는진 모르겠지만 그때의 그 마음과 비참함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나마 제일 오래 살았던, 그리고 현재도 살고 있는 집 8평짜리 임대 아파트. 처음 이사 간다고 했을 때 나는 임대라는 단어를 몰라 그저 아파트라는 말에 신났었다. 나에게 집은 화장실이 안에 있고, 방 창문을 열었을 때 지하 벽에 막혀있지 않으면 됐고, 여름 장마철에 창문 옆 하수구가 막혀 물이 넘어오는 일만 없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허름하고 어두침침한 분위기이긴 해도 나와 엄마가 처음 살아본 아파트이다.
엄마의 인생은 내 집 한번 못 가져보고 항상 바쁘게 일했지만 가난을 벗어날 순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나마 좀 쉴 나이가 되니 (비록 노후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지만..) 아들 결혼식 날 뇌출혈로 쓰러졌다. 첫째인 나는 독립해서 나갔고, 본인이 키우지 못해 언제나 마음 쓰이던 아픈 손가락 아들은 결혼을 하게 됐다. 이제 자식들 입에 들어가는 식비 버느라 아등바등거리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오니 병이 찾아왔다.
너무 억울했다. 내가 다 억울했다. 열심히 살았던 엄마의 비참한 노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엄마와 여행 한 번 가본 적도 없고 엄마에게 못해준 기억만 나는 것이다. 숨을 쉴 때마다 후회만 밀려왔고 생각에 잠길 때면 미워할 대상이 없는 분노만 치밀어 올랐다. 그 분노는 결국 나를 향해서 나에 대한 혐오만 생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