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우유 할머니

행복한 또라이

by 보라

우리 마트에는 일주일에 서너 번 잊지 않고 오시는 할머니가 계신다. 늘 사는 것도 정해져 있다. 바나나우유. 계산은 무조건 현금이다. 할머니는 바나나우유를 가지고 와서 매장 입구 쪽에 자리 잡고 앉아 오가는 손님을 바라보시며 드신다. 여기서 오래 사셨는지 오가는 고객 중 절반 이상에게 인사를 건네신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계시는 게 마음에 걸려 조그만 이동식 의자를 가지고 다가가자 어르신이 먼저 일어서시며 말씀하신다.

“조금만 있다 갈 거니 신경 쓰지 말아요.”

“할머니, 더 있다 가셔도 돼요. 여기 앉아서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

내가 의자를 펼쳐서 자리를 만들어드리자 이내 눈빛이 풀린다.


“할머니, 자주 오시는 것 같던데 여기 의자 놔둘게요. 오시면 여기 앉아서 편히 드시고 가세요.”

내가 뒤돌아서자 머뭇거리시던 할머니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신다.


점심시간, 직원들이 굳이 바나나우유 할머니에게 자리까지 만들어드렸냐며 내게 핀잔을 준다.

“할머니가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매일 오셔서 매출 올려주시니 감사하죠. 할머니 때문에 불편한 게 있나요?”

“그래, 쟈 말이 맞네. 나이도 있는 양반이 찬 바닥에 앉아계시는 것도 보기 안 좋아.”

은주 언니가 거들어 주자 다들 입을 다문다.


다음날 CCTV로 할머니가 보인다. 이젠 좀 편해지셨는지 제법 자리 잡고 앉아서 웃으며 여느 때와 같이 오가는 손님들과 대화 중이시다. 아무래도 의자를 하나 더 놔드려야겠다.

이러다 동네 사랑방이 되겠다는 점장님의 뼈 있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다 우리의 소중한 고객인 것을.


매장에서 거래처분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바나나우유 할머니가 오신다. 그리고는 바나나 우유 하나를 내미신다.


“새악시, 이거 먹어요. 새악시 덕분에 내가 편해. 고마워.”


할머니의 주름 가득 웃음이 달려있다. 내 마음에도 웃음이 달린다. 어느새 나도 할머니 옆에 자리 잡고 앉아 바나나우유를 쪽쪽 들이키고 있다. 할머니는 먹는 것도 이쁘다며 연신 날 보고 웃으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情에 마음 한 구석이 시큰하다. 우리 할머니도 어린 날 보고 이렇게 웃으셨다. 이렇게 인연의 끈이 또 하나 연결되었다.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 할머니의 사연은 대하소설급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태어나 일본어는 배웠어도 한글은 배우지 못했다. 먹고살기 바쁜 K장녀로 동생들 뒷바라지에 6.25 전쟁을 겪으며 아무 연고도 없는 남한에 내려와 지금까지 오로지 희생만 하면서 살아오셨다. 할머니에게 남은 건 아픈 몸과 눈치, 타지에 살고 있는 아들 셋이다. 바나나우유만 드시는 것도 글자를 읽지 못해서 다른 건 뭔지 모르기 때문이란다. 그저 오랫동안 알고 맛본 마름모꼴의 바나나우유가 익숙하니 그것만 고집하는 거였다. 너무나도 다양한 맛과 상표들은 그저 할머니의 머리를 어지럽게 할 뿐이었다.

아들들은 모두 서울에 살고 있다고 했다. 다들 각자 한자리들 하고 있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고 하는 걸 자신이 뿌리치고 여기 혼자 살고 있는 거라고, 혼자 있는 게 자식 눈치 보는 거보다 편하다고 하시는 말끝이 외롭다. 또 자신이 한글은 몰라도 계산과 일본어는 자신 있다며 유창하게 일본노래를 부르실 때는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의 끝자락이 날 쓰리게 했다.



✔ 꼬인 마음과 장


사실 나는 우유를 먹지 못한다. 우유와 유제품을 먹으면 화장실로 가는 꼬인 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우유를 2개씩 신청해서 먹곤 했었다. 어느 날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장염을 겪고 나서부터 장은 가려서 소화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내민 우유를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하며 거절하기보다는 화장실 가는 걸 택했다. 할머니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호의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할머니는 나의 속사정은 모른 체 그저 내가 잘 먹는 걸 바라보시며 웃으셨다. 그 미소가 화장실에서 힘겨워하는 나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 후로도 몇 번 화장실에 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주시는 바나나 우유는 해가 없음을 내 몸이 깨닫기 시작한 것처럼. 인연의 끈이 꼬인 내 마음뿐 아니라 장도 풀어주었나 보다.(하지만 다른 우유는 지금도 화장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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