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세계가 아닌 환장의 세계

행복한 또라이

by 보라

정리할 서류가 있어 다시 경기도로 가는 길. 가족이 남이 되기까지 정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특히 미성년 아이가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대관령을 넘어 강원도를 벗어나자 익숙한 미세먼지가 나를 반긴다. 눈과 코를 공격하던 미세먼지는 내 심장까지도 공격한다. 나의 추억과 기쁨, 아픔이 있는 곳. 그 근처에 오기만 했는데 눈물이 난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서류 정리를 위해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난 죄인이 된다. 그렇게 모든 일을 불안하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갈 때의 불안과 힘겨움이 무색하게 돌아가는 길은 가뿐하다.


영동고속도로를 타자 차들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보이던 차들이 아예 안 보인다. 어둠이 내린 고속도로 오르막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이렇게 올라가다 보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진다.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로 가고 싶다. 희망과 사랑의 세계로. 하지만 반대편 차선에 차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환상의 세계가 아닌 환장의 세계에 여전히 갇혀 있음을 깨닫는다.


대관령을 힘겹게 넘어 드디어 강릉의 불빛이 날 반긴다. 톨게이트를 지나자 드디어 아군 진영에 온 듯 마음이 안정된다. 밤이지만 커피 한잔 마셔야겠다. 이 복잡한 감정들을 커피로 삼켜버리고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렇게 나 자신을 위로해야겠다.


✔ 대신 화내주는 사람이 있다면


캐셔 한 사람이 喪中이다. 오늘은 사무실이 아닌 매장에서 계산을 도와야 한다. 하던 일이 아니라 서툴지만 특유의 미소로 잘 넘어가고 있었다.

“이거 빨리 계산해 줘.”

이건 또 뭔가. 정신없이 계산하고 있는데 다음 손님이 물건을 던지듯 올려놓고 말한다. 50대 후반의 비교적 젊지도 늙지도 않은 사람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반말을 하면 그러려니 하지만 이건 아니다. 그렇다고 반말로 응대할 수도 없고.

‘그래, 똥은 무서워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 피하는 거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웃으며 묻는다.

“포인트 적립하세요?”

내 미소가 무색하게 카드를 던지며 말한다.

“그런 거 없고, 빨리 계산이나 해.”

아, 통재라. 드디어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나이도 별로 안 돼 보이는데 반말하면 되나, 듣자 하니 기분 나쁘네.”

거래처 사장님이 뒤에서 계산을 기다리다 한마디 한다. 이분은 외모는 뒷골목 사람 같지만 현실은 운동 좋아하는 건강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다. 오랜 운동으로 몸이 화가 나 있을 뿐 마음은 화가 없다. 외모와 달리 화가 가득한 나와는 정반대이다.

거래처 사장님을 위아래로 훑던 사람은 아니다 싶었는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카드를 챙겨 나간다.


“저런 인간들 정말 별로지 않아요?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한마디 해 주셔서 고마워요. 속이 다 시원하네요.”

“나도 장사하지만 저런 인간들 오면 알바에게 맘 놓고 같이 반말하라고 해요. 반말하는 인간들한테 굳이 예의 갖출 필요 없잖아요.”

한사코 거절하는 사장님께 견과류 한 봉을 넣어드렸다. 다음에는 내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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