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못러에서 벗어나기
신입사원 시절, 나랑 동갑인데 나보다 3년 먼저 회사에 들어온 선임 여사원이 있었다.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우리 동갑이니까 그냥 편하게 내 이름 불러도 돼"
난 그걸 곧이 곧대로 믿었다. 점심시간이 되었고 나는 그 여사원을 불렀다.
"혜린아! 점심 먹으러 가자"
순간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해진 것이다. 난 그 여사원 얼굴을 쳐다봤다. "내가 편하게 말 놓으라고 했어요" 이 말을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 여사원은 딴 곳을 쳐다보며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순간 나만 예의없는 직원으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이다. 나만 바보가 되고 말았다.
물론 내가 신입사원이어서 회사 물정을 모르던 시절의 일이다. 그렇지만 그 여사원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 때 한 마디라도 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제가 편하게 말 놓으라고 했어요" 이 한 마디만 했으면 사람들이 "그래도 사무실에서 그러면 안되지" 이 정도로 말하고 끝났을텐데 말이다.
위의 일은 그냥 해프닝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이보다 훨신 심각한 모른척의 상황들이 발생한다.
몇 년 전에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미 당국자 간에 비밀회담이 있었는데 그 회담 내용을 외교부 고위직원이 모 국회의원에게 전달한 일이 있었다. 그 국회의원은 언론에 폭로했고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비밀회담 내용을 폭로하는 것은 공무상 비밀누설죄에 해당한다. 그 외교부 고위직원이 아무 이유 없이 국회의원에게 전달했을 리는 없다. 분명 국회의원의 부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위직원이 국회의원에게 해명을 요청해도 국회의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결국 그 고위직원은 해임되었다. 피해는 온전히 고위직원의 몫이 된 것이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 업무를 지시한 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 직원이 무능해서 그런 거라고 직원 탓하는 상사
- 은밀한 업무를 지시했는데 소문이 나는 경우,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 떼는 상사
- 같이 일하기로 되어 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나는 메인 담당자가 아니라고 발 빼는 동료 직원
- 직장 상사 흉을 같이 봤는데 문제가 되자 "쟤가 그런 거예요"를 외치는 동료 직원
참 속 터지는 일이다. 동료가 그러는 것이라면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고 상사에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문제는 상사가 저렇게 모르쇠로 나오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내가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쉽지 않다. 만일 불법적인 일이라면 그 지시를 따른 나에게도 귀책사유가 있기 때문에 나 역시 공범이 되어 대처가 더욱 어렵게 된다.
답은 간단하다.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나에게 불똥이 튈 것만 같다. 그러니 최대한 거리를 두려는 것이다.
자기가 시킨 일, 말했던 일이라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런건 멍멍이한테 줘버리고 "아! 몰랑!" 을 시전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한 번 당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사우나 한증막 속의 아이스크림 처럼 1분만에 녹아 내린다. 다시는 같이 일하고 싶지도,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지내고 싶지 않게 된다.
일단 가까이 하지 말자.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상책이다. 그 사람이 동료나 친구라면 서서히 멀리하자.
만일 그 사람이 직장상사라면 거리를 두기 쉽지 않다. 이 때는 녹음을 하자. 이런 사람들은 꼬리 자르기의 귀재들이다. 내가 빛이 날 상황에는 숟가락 들고가서 어떻게든 숟가락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불똥이 튈 상황에는 꼬리 정도가 아니라 팔 하나라도 자르고 도망갈 사람이다. 자칫 내가 모든 오물을 옴팡 다 뒤집어쓸 수 있다.
요즘은 '클로버 노트' 등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녹음 앱이 있다. 심지어 녹음한 내용을 텍스트로 변환해주기도 한다. 당사자 간의 대화는 녹음해도 통신비밀보호법에 위배되지 않는다. 당연히 증거능력도 인정된다. 그러니 적극 활용하자.
윗사람의 기세에 눌려서, 그냥 순진한 마음에 "예! 예!" 이렇게 다 받아주면 안된다. 분명히 따질 것은 따지자. 그래야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고 다시는 이런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지 않는다.
"이건 팀장님께서 지시하신 것이고 팀장님이 말씀하신 방향대로 그대로 한 것인데 왜 저한테 이러세요"
예전 인사팀에 근무할 때 팀장 리더십 평가를 매 년 마다 진행했다. 그 때 한 인사팀 임원이 은밀하게 나에게 부탁한 내용이 있었다. 나에게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세부 응답을 보고 싶다고 한 것이다.
리더십 평가 점수가 매우 낮게 나온 임원이었다. 아마도 누가 자기에게 나쁜 평가를 했는지 알고 싶어서 물어본 것 같다. 개인 응답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엄연한 회사 규정 위반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가만 있을리도 없다. 응답 내용을 알게되면 나쁜 평가를 한 직원들에게 해코지 할게 뼌했다.
고민은 했지만 먼저 팀장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내 생각도 같이 전달드렸다. 이건 안되는 일이라고. 팀장도 고민을 하다가 절대 알려주지 말라고, 만약에 계속 요구하면 그냥 권한이 없어서 열람이 안된다고 말하라고 했다. 나는 결국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큰 문제 없이 일이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자기 권위를 이용해서 부탁해 놓고 불리해지면 난 몰랐다는 듯이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과 엮이면 망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상사라도 나 혼자 책임지는 것이 잘못된 경우라면 분명히 내 입장을 말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녹음 등 자료를 꼭 갖추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