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는 일 잘하는 방식
며칠 전, 커터칼로 종이를 자르다가 손가락을 베인 일이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 급하게 찾은 것은 바로 '밴드'였다.
"밴드! 밴드!"를 부르짖으며 서랍을 샅샅이 뒤졌고, 마침내 밴드를 다친 손가락에 붙일 수 있었다.
5일 뒤, 손가락은 아물었다. 더 이상 밴드는 필요 없게 되었다. 밴드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 밴드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되었다. 더 이상 나에게 활용가치가 없어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도 이렇지 않을까? 내가 필요할 때는 간절하게 부르짖더니, 더 이상 필요 없어지면 밴드와 같이 가차 없이 버리게 되는 일이 많지 않을까 싶었다. 토사구팽이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실제 역사에도 밴드처럼 토사구팽 당한 사람들이 여럿 나타난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를 꼽자면 잔 다르크를 들 수 있다.
잔 다르크(Jeanne d'Arc)는 프랑스의 젊은 여성이었다. 당시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백년 전쟁' 이 벌어지고 있었다. 말이 백 년이지 실제로는 116년 간 두 나라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멈췄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전쟁 초기에 영국에 밀리고 있었다. 프랑스 동쪽에는 부르고뉴라고 하는 귀족령 땅이 있었다. 부르고뉴가 영국과 한 편이 되어 양 쪽에서 프랑스를 공격하자, 프랑스는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영국에 항복할지 말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왕세자인 샤를 7세는 아버지에게도 버림 받고 여기저기 영국군에 쫓겨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영주들에게 샤를 7세는 무늬만 왕세자였던 짐짝 같은 존재였다. 영주들에게 홀대 받기 일쑤였고, 왕세자 교체설도 끊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때 잔 다르크가 나타난다. 그녀는 원래 평범한 양치기 집안의 어린 소녀였다. 아버지를 따라 산을 오르내리며 양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프랑스를 당장 구하라"
처음에는 꿈에서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음성은 밤에다 계속 이어졌다. 마침내 그녀는 프랑스를 위해 이 한 몸을 바치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고작 16세였다. 당시 그녀가 살던 마을은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 마을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이런 배경도 그녀가 기꺼이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잔 다르크는 곧바로 샤를 7세가 머무르고 있는 시농 성으로 찾아가서 샤를 7세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거부당했다. 샤를 7세가 아무리 몰락한 왕세자라고는 해도, 일개 평민 여성이 당돌하게 일대일로 만나자고 하는데 승낙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프랑스와 왕세자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이 때, 샤를 7세는 자기 시종에게 왕세자 옷을 입혀 자기 자리에 앉히고, 본인은 시종들 무리에 섞여 있었다. 잔 다르크는 귀신 같이 변장한 시종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시종의 무리에 섞여 있던 왕세자에게 예를 표하였다. 그래도 의심을 풀지 않은 왕세자는 성직자들을 통해 심문하도록 했으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왕세자의 측근으로 전투를 이끄는 역할을 부여 받았다.
파리 인근에는 오를레앙 성이 있다. 이 성이 뚫리는 순간 영국군은 곧바로 파리로 직행하게 된다. 프랑스는 이 성을 목숨걸고 사수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 성을 뚫고 트루아로 직행하는 순간 길고 긴 전쟁을 끝낼 수 있기에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6개월이 넘도록 승부는 결정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성이 포위되면서 식량은 부족해지고 있었고, 프랑스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져 갔다.
이 때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 군이 오를레앙 성으로 진격한다. 성 앞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어 배를 타야 성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군이 접근할 당시 강풍 때문에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배를 탄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 때 잔 다르크가 기도를 하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딱 멈추었다. 이렇게 그녀는 프랑스 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영국군이 이 때 잔 다르크 군을 공격했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원래 전투에서는 강을 건너는 때가 취약한 순간이다. 강가에 있는 적군이 마음 먹고 총공세를 펼친다면 방어가 힘든 탓이다. 그러나 여자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라는 사실에 영국군은 별다른 공격을 하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바람을 멈추게 한 잔 다르크의 명성은 이미 오를레앙 성에 퍼져 있었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이 때 잔 다르크는 눈에 확 띄는 흰 색 갑옷을 입고 선두에서 싸웠다. 그녀는 성녀와 다름 없었다. 사기가 오른 프랑스 군은 영국군을 떄려 부쉈다. 그리고 6개월 넘게 지지부진하던 오를레앙 공방전은 잔 다르크가 단 하루 만에 끝내게 되었다.
이후 잔 다르크는 승리를 거듭하게 되었다. 영국군은 성녀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무서워했고, 싸우기도 전에 겁을 먹고 물러서게 되었다. 파테 전투에서는 영국군 최고의 장수 중 하나였던 존 탈보트를 사로잡게 되었고, 루아르 전투에서도 강변에 주둔했던 영국과 부르고뉴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 지역을 회복하게 되었다.
샤를 7세는 랭스를 탈환하고 싶어했다. 랭스는 역대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치르던 상징적인 도시였다. 이곳을 탈환하고 본인 업적을 인정받아 정식으로 프랑스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당연히 영국군도 이 지역의 중요성을 알기에 철통같이 방어를 하고 있었다. 자칫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기꺼이 랭스 전투를 치뤘고, 그 지역을 탈환할 수 있었다. 마침내 샤를 7세는 그녀의 도움으로 프랑스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샤를 7세에게 충성하라고 알리는 한편, 백성들을 설득하여 전쟁에 참전하도록 만들었다. 프랑스에서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이미 하나님 아래 잔 다르크일 정도로 그녀는 엄청난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샤를 7세가 잔 다르크에게 고마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 절반을 뚝 뗴어줘도 아깝지 않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기 그지없다. 떠돌이 왕세자 시절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잔 다르크에게 매달리더니, 왕이 되고 나자 그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더 존경받고 인기가 많은 그녀가 점점 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가는 왕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샤를 7세는 이제 슬슬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대충 이 정도 상태에서 영국과 협상해서 영토를 보전 받고 자기 왕권만 굳건히 하면 손해볼 것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프랑스 땅에서 완전히 영국을 몰아내야만 다시는 영국이 쳐들어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화평을 추구하던 왕과 전쟁을 추구하던 그녀는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었다.
이 때 샤를 7세는 그녀와 그녀 가족들에게 귀족 작위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가서 편하게 여생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겠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박수칠 때 떠나면 평생 안락하게 살게 해줄테니 더 이상 내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완곡한 의사표시였다. 그녀가 그 의도롤 눈치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제안을 거절하고 게속 전투에 임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이제 둘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다.
영국과 연합한 부르고뉴 군대는 콩피에뉴를 공격하였다. 성은 함락 직전이었고, 그녀는 300여명의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부르고뉴 군을 기습 공격했다. 초반에는 기습이 효과를 거두었지만, 부르고뉴가 6천명의 응원군을 급파하면서 다시 상황은 불리하게 흘러가게 되었다.
이 때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300명을 급히 성 안으로 대피시키면서 잔 다르크는 가장 나중에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First in, Last Out 이 살신성인의 정신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성 안으로 들어가려던 때, 성문이 그냥 닫혀 버리고 말았다. 뒤에는 부르고뉴 군이 있는데 앞의 성 문은 닫혀 버린 것이다. 독 안에 든 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문을 열어달라고 문을 두들겨도 안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이건 누가 봐도 의도가 뻔히 보이는 일이었다. 배후에서 샤를 7세가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잔 다르크를 없애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없애버릴 수 있으니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잔 다르크는 샤를 7세에게 토사구팽 당하고 말았다.
부르고뉴는 프랑스로부터 거액을 받고 잔 다르크를 넘기고 싶어했다. 샤를 7세에게 몸값만 지불하면 바로 풀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녀를 없애버리기로 마음 먹는 왕이 몸값을 지불할 리가 없었다. 들은 체도 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부르고뉴에서는 현재 시세로 50억원 정도에 영국에 그녀를 넘게 버리게 된다.
그녀는 영국에 항복한다면 선처해주겠다는 회유를 끊임없이 받았다.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조건으로 평생을 수녀원에 갖혀 지낸다면 안전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제안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회유를 다 거절한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프랑스를 구하려 한 것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화형이라는 극형에 쳐해지게 되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나를 죽이는 이 사람들을 용서해달라" 는 말을 남기고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 들였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이때도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외교적 협상을 통해 충분히 구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녀를 외면했다. 정치의 세계는 이토록 무정한 것이다. 과거에 그 사람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을 줬건 말건 그건 중요하지 않은게 냉혹한 현실의 모습이다.
잔 다르크는 700년 전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가 환영받고 버림받는 모습은 요즘 시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송나라 때의 악비, 명나라 때의 원숭환, 조선 때의 이순신 장군 등 토사구팽의 사례는 많다. 다윗 역시 그렇게 나라를 위해 헌신했건만 돌아온 것은 사울왕의 끊임없는 암살 시도였다.
회사에서도 나이 든 직원들은 퇴물 취급 받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그 직원이 자기 혼을 바쳐서 일을 했건 말건 그건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눈치 줄 때 제발 좀 나가줬으면 한다. 회사에서 나이 많은 직원들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드는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비정한 회사에 목숨바쳐 충성할 직원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잔 다르크는 인간 같지도 않은 샤를 7세에게 끝까지 충성했지만 요즘 직원들은 다르다. 다른 회사로 떠나거나 적당히 일하는 법을 택하게 된다.
토사구팽 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힘을 키워야 한다. 회사는 회사대로 다니되 제 2의 인생 준비를 착실히 해야 한다. 그게 나를 지키는 일이다. 이건 하면 좋고, 안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무조건 해야 한다. 내가 가진 강점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꾸준히 개발해나가자. 잔 다르크 같은 비운의 주인공은 더 이상 생겨나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