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는 일 잘하는 방법
대한민국 국민들이 존경하는 역사상 위인들은 누가 있을까? 1위는 이순신 장군, 2위는 세종대왕이다. 이 순위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만큼 세종대왕은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국민들이 존경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의 인사 철학은 과연 어땠을까? 그는 뚜렷한 철학이 있었다. 비록 과거에 비리가 있었더라도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내치지 않고 활용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선을 긋고 그 역할 이상을 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매번 새 정부가 들어서면 총리, 장관 등 주요 공직자들을 임명하게 된다. 수많은 비리나 갑질 등 악행이 밝혀지면서 낙마하는 사례도 많이 발생하게 된다. 회사에서도 능력은 있는데 근태가 불량하거나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사람, 술만 마시면 주정이 심한 사람 등등 중대한 단점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을 하게 된다. 사실 세종대왕의 방식이 절대 정답은 아니다. 당시에도 많은 신하들의 심한 반발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 사건은 능력은 출중하나 비리가 있는 사람을 계속 활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기에 내용을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조말생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평탄하게 출세길을 계속 갔더라면 유명 해졌겠지만, 어느 순간 확 꺾여버렸기 때문이다.
조말생은 31세 때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게 된다. 태종은 그의 능력을 아껴 종1품의 높은 품계를 부여할 정도였다. 이후 그는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 조정의 높은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되었다. 심지어 그의 맏아들은 태종의 딸과 결혼하였다. 왕실의 인척이 된 것이다.
그렇게 순탄하게 관운이 따르던 그에게 엄청난 시련이 밀어닥치게 된다. 그 사건은 이후 조정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가 56세 때, 김도련 사건이라는 권력형 게이트가 터지게 된다.
김도련은 아주 악질적인 인간이었다. 그의 지인 중에 김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악감정을 갖고 그를 파멸시키기로 결심한다.
김생은 천 명 이상의 노비와 수많은 논밭을 보유한 갑부였다. 김도련은 서류를 조작하여 김생이 원래 노비 출신인데 신분을 조작하여 부를 축적했다고 조정에 고발했다. 무고인 것이다. 악질 중의 악질인 범죄인데, 이때 김도련은 김생이 보유한 천 명 넘는 노비들을 뇌물로 이용하게 된다. 남의 재산으로 뇌물을 주는 유례를 찾기 힘든 방식이었다.
당시 형조판서는 조말생이었다. 오늘날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급의 위치였다. 조말생은 36명의 노비를 뇌물로 받고 김도련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생이 노비 출신이라고 판결을 내리고 그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그와 그의 가족, 일가친척들의 신분도 노비로 강등시키라는 결정이 나온 것이다.
김생은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다. 이때 하루아침에 노비가 된 김생의 일가친척은 무려 400명이 넘었다. 조금만 조사를 해봐도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금방 밝혀질 일인데도 판결 및 집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당연히 증거자료는 다 파기되고 말았다.
김도련이 당연히 조말생에게만 뇌물을 줬을 리 없다. 조정 주요 대신들에게 노비를 두루두루 뇌물로 바쳤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소문은 새어나가기 시작했고, 김생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이 사건은 세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당시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받던 시기였다. 건장한 성인 노비 한 명은 약 20관의 가치를 지녔다. 조선 시대 형법에는 관료가 80관 이상의 뇌물을 받으면 사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다. 4명 이상의 노비를 뇌물로 받는 순간 이건 사형인 것이다.
조말생이 챙긴 노비의 가치는 무려 780관이었다. 열 번 처형당해야 하는 중죄 중의 중죄였던 것이다. 대신들은 매일같이 궁궐 앞에 멍석을 깔고 엄한 처벌을 촉구했다.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사람들부터 사약도 아깝고 목을 쳐야 한다는 상소문까지 궁궐은 벌집을 쑤신 듯 정신이 없었다. 그의 목숨은 이제 어찌 될 것인가?
그러나 세종은 이상하리만큼 조말생에게 관대했다. 아무리 신하들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들고일어났지만 세종은 충청도 지방으로 유배 보내는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했다. 유배도 2년 만에 풀렸고 그는 그로부터 4년 뒤 다시 관직에 복귀하게 된다. 이때도 신하들이 매일같이 그를 파면하라고 궁궐 앞에다 멍석을 깔고 시위를 벌였지만 세종은 싹 무시해 버렸다.
그는 함경도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 직위를 받고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방어하고 새롭게 조선 땅이 된 그 지역을 안정시키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후 그는 군사 업무를 주로 수행하면서 해안가를 방비하고 성을 쌓는 일을 주로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77세까지 장수하며 천수를 누리고 죽게 되었다. 진작에 처형당했어야 할 사람이 평안하게 삶을 누리고 눈을 감은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왜 세종대왕은 조말생을 그토록 감싸고돌았던 것일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것일까? 일벌백계로 다스리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조말생이 군사분야의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세종 당시는 함경도 지역 여진족들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대마도 정벌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조에서 8년 간 근무했고 세종 초에 왜구 토벌 작전을 맨 앞에서 성공적으로 이끌던 조말생의 능력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비리가 있더라도 지금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과거의 비리는 눈 감아주고 넘어가는 것이 세종의 인사철학이었다. 이는 황희 정승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황희 정승 역시도 아들과 관련된 큰 비리에 연루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세종은 그를 파직시키고 처벌하라는 신하들의 청을 물리치고 황희 정승을 계속 중용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신하들의 비리를 그저 눈 감아준 것은 아니었다. 조말생에게는 군사적인 역할을 부여하여 변방에서 방비를 강화하는 역할이 주로 부여되었다. 그러나 과거와 같이 중앙정부 요직으로는 기용하지 않았다. 후에 조말생이 나는 억울하게 당한 것이라고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세종은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신이 비리를 저지른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럼에도 내가 당신을 임명한 것이다 이 취지를 분명하게 밝힌 것이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이것이 세종의 인사철학이었던 것이다.
일벌백계로 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 기강을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 죄를 뉘우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세종대왕의 이런 인사정책이 꼭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리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처벌하여 공직사회의 청렴함을 유지하고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렴함만을 강조하며 과거의 일까지 다 끄집어내서 그 사람을 배척하고 그 사람이 잘할 일까지 평가절하하는 일이 과연 옳은 것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회사에서도 과거 실수했던 것, 좋지 못한 일에 연루되었던 것만을 문제 삼아 그 사람을 배척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다. 이렇게 되면 능력 있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진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 잘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전문분야를 맡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 혜택이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가게 된다.
세종대왕이 명군으로 칭송받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인사철학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비리나 흠결에 대해 칼을 휘두르기보다는, 기회를 주고 그 대신 죄에 대해서는 감추지 않고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 대신 재차 비리를 저지르거나 무능한 모습이 발견되는 경우에는 엄하게 다스렸다. 두 번 용서하지는 않은 것이다. 미안하고 사죄하고픈 마음이 있다면 유능한 모습을 보여서 공을 세워 죄를 씻으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조말생이 70세가 넘은 뒤, 몸에 무리를 느껴 이제 그만 사직하고 싶다고 열 번 넘게 간청해도 세종은 절대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국방 분야 전문가라서 필요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죄가 있는 만큼 평생토록 나라를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라는 세종의 뜻도 있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사람을 쓸 때 세종대왕의 이런 인사 원칙을 한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이게 정답은 아니고 반론 제기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종의 아래 인사 원칙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