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벌의 교실(1)

달님이와 여왕벌

by silvergenuine

달님이는 한글 해득이 무척 느렸지만, 수학 기초연산은 평균 수준으로 잘 해냈다.

"달님이가 덧셈뺄셈을 잘 하네, 비결이 뭐야?"

"저 방과후에 주산 배워요."

"우와, 주산을 배운다고? 안 어려워?"

"안 어려워요, 재미있어요."

방과후 수업으로 주산을 배우면서 수학 연산만큼은 자신 있어해서 다행이었다.

교우관계에서는 반에서 서로 친하다고 내세울 만한 단짝은 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갈등 없이 잘 지내는 듯 보였다. 한글이 느리다고 반아이들이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학습활동에 불편을 겪을 때가 많아서 내가 조용히 도움을 건네곤 했다. 달님이는 한글은 못해도 다른 것은 눈치껏 해내었고 속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기 마음을 숨기고 머쓱한 웃음으로 넘길 때가 많았다.


7월의 어느 오후였다. 종례 직전에 달님이가 다급한 표정으로 교실 앞으로 나왔다.

"선생님, 저 쉬, 쉬 마려워요."

일말의 여지도 없이 너무 급해보여서 얼른 가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달님이의 다리 아래로 후두둑 소변이 흘러내렸다. 지금이라도 끊고 화장실로 갈 수 있기를 바라며 앞문 쪽으로 데리고 갔지만 한 번 터진 오줌보는 멈출 줄을 몰랐고 소변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필 교실 앞에 나와서 실수해버리다니! 다른 아이들의 표정부터 살폈다. 일부 아이들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달님이 왜 그래요?"

하며 묻기도 했는데

"아니야, 신경쓰지말고 바로 인사하자. 오늘 일일반장 누구죠?"

교실 앞으로 나와 확인하려드는 아이들을 서둘러 내보내고 뒷수습을 시작했다. 참고 참은 양이라 교실 앞이 물바다였다. 일단 아이들이 모르고 밟지 않도록 앞문 근처 잔방울들만 먼저 닦았다.

문제는 옷이었다. 원래 교실 사물함에 갈아입을 여분의 옷을 두도록 했었는데 달님이는 어제 옷에 물을 쏟았다며 스스로 갈아입었던터라 사물함에 옷이 없었다. 일단 달님이를 여자화장실 칸막이 안에 들어보내 아랫도리를 벗어달라고 해서 세면대에서 치대어 빨고 학교에 있는 세탁기로 탈수를 했다. 여전히 옷이 축축했지만 우선 입으라고 한 뒤 달님이 엄마에게 연락을 했다. 통화가 되지 않아 문자를 남겼다.

"하교 직전에 달님이가 소변 실수를 해서 일단은 간단히 세탁하고 탈수해서 입혔습니다. 지금 학교로 달님이옷을 가지고 와 주실 수 있나요? 달님이가 부끄럽고 놀랐을 것 같아요, 집에서 잘 다독여 주세요."

"그랬군요. 제가 지금 학교에 갈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냥 입고 있게 해주세요. 금방 마르겠지요."

와우, 쏘쿨하시군. 그렇다. 무더운 7월이다. 럭키비키잖아?

어쩐지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사는 게 바쁜 옛날에는 이렇게도 많이 키웠을텐데, 실제로 달님이 엄마는 다른 엄마들보다 연세가 좀 있으셨고 요즘 엄마들과는 사뭇 다르게 옛날 엄마 느낌이 났다. 내가 교사로서 겪어본 학부모들은 대체로 이런 상황에 얼른 옷을 가지고 오거나 아이를 집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금방 마를테니 그냥 입고 있게 해달라, 이런 반응 처음이야.

달님이는 그대로 돌봄교실에 갔고 돌봄선생님은 달님이가 소변 실수를 한 것 같다며 나에게 연락을 했다.

"아, 교실에서 실수해서 제가 빨아입힌 거에요. 탈수했는데도 좀 축축하지요? 달님이 엄마와는 제가 통화했어요. 입고 말리라고 하시더라구요. 네네, 날이 더워서 빨리 마를 것은 같아요. 네, 돌봄 마치고 바로 피아노 보내시면 돼요. 달님이는 괜찮아 보여요?"

눅눅하고 찝찝했을 텐데 달님이는 그렇게 오후 일정을 다 소화하고 집에 갔다.

다음날 달님이는 평소처럼 등교했고 다른 아이들도 그 일에 관심 갖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사건을 보면 달님이가 지금껏 엄마의 양육스타일에 적응해서 성장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엄마는 웬만한 일들은 대수롭지 않게 대응했을 것이며, 달님이의 소소한 요구들은 가볍게 묵살당해 왔을 것이다. 달님이는 자기보다 똑똑한 오빠의 그늘에 가려져 사랑받기 위해 조용히 애썼을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자기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고 자기의 요구를 표현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던 것 같다. 타고난 기질이라도 예민하면 엄마를 이겨먹을듯이 까탈이라도 부리고 '엄마는 나 오줌쌌는데 어떻게 말리면 된다고 했냐'며 두고두고 원망할텐데, 달님이는 그저 순했다.

어쩌면 엄마가 무심한 만큼 본인도 무심히 넘길 힘을 냈을 수 있었겠단 생각도 든다. 달님이 엄마의 반대 스펙트럼에 있는 엄마라면 "선생님, 우리 아이가 소변 실수를 할 때까지 어떻게 그렇게 모르셨을 수가 있어요? 선생님이 무서워서 애가 말도 못한 거 아니에요? 아이가 받은 상처 어떡할 거에요? 이거 정서학대 아니에요?" 라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런 건 아이에게 그다지 좋은 대응은 아니다. 담임으로서는 더더욱.


달님이의 자존감은 무사할까.

한글 미해득으로 인한 위축, 알아서 하라는 엄마의 양육방식, 오빠에게 우선권이 있는 가정분위기에 익숙해졌는지 달님이는 자신의 이익 주장에 약하다. 달님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마음 속에서는 '난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정체성이 자리잡아갈 것 같아 안쓰러웠다.


이후 참관수업에 오신 달님이의 어머니를 보았다. 나이 들고 삶에 찌들어보일거라고 내 나름대로 상상해버린 것과 달리 세련되게 꾸미고 화사하게 웃는 모습이셨다. 평소 보던 달님이의 모습과 대조되어 보였다.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이 참관수업에 한껏 힘을 주어 오시니깐 그런거구나 싶기도 하고, 어쩌면 자기애가 강해서 아이보다 자기가 우선인 분이신가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엄마가 참관수업에 오신 걸로 그날 달님이는 충분히 행복해보였다.


우리반에 여왕벌이 있다고?

1학기 중간 무렵, 교무실에서 마주친 놀이체육 전담선생님이 우리 반 아이들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 반에 여왕벌 있잖아, 걔 좀 잘 봐야겠더라"

"네? 여왕벌이요? 무슨 말이에요?"

"손소율 걔가 그 반 여왕벌이잖아. 몰랐어? 피구를 하면 애들이 걔를 못 맞춰. 어쩌다가 실수로 맞추면 미안하다고 엄청 사과를 해."

"피구를 하면 당연히 맞추지, 그걸 사과를 한다구요?"

"피구공에 맞으면 여왕벌 표정이 싹 변하니까 애들이 눈치를 봐. 걔 장난 아니야. 잘 지켜봐"

뜻밖이었다. 교실에서는 밝은 성격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고 두루 잘 어울리는 아이로만 보였다.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게 지나치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적극적인 성격이라서 그런가보다 했고 교실 활동에 협조적이라 내심 믿고 있던 아이였다.

여왕벌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보았다. 알고보니 미국 하이틴 문화에서 퀸 비(Queen Bee)라고 하여 자신의 인기를 이용해 다른 학생들의 관계와 심리를 주도적으로 지배하는 여학생 캐릭터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 선생님이 남자임에도 딸만 둘이라 그런 용어에 빨리 눈을 뜨신 것 같다. 아들만 둘이었던 내가 늦기도 했고.

그 분의 지적 이후로 우리 반 소율이의 여왕벌스러운 행동들이 조금씩 포착되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대놓고 친구들을 차별하지는 못했지만, 누구 때문에 자기가 피해를 보았다고 호소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를 은근히 공격했다.

"선생님, 제가 소인이랑 놀고 있는데 해님이가 자꾸 방해해요."

"선생님, 영태가 지나가다가 제 필통을 떨어뜨렸는데 미안하다고 안 했어요."

"선생님, 준하가 지나가다가 제 어깨에 부딪쳐서 너무 아파요."

목소리와 행동이 큰 눈치없는 남학생들이 주된 고자질 대상이었고, 여학생들은 자기에게 거슬리게 행동하는 것이 없으니 내게 고자질할 것이 별로 없었다. 쉬는 시간에 주로 어울리는 소인이를 단짝으로 삼고 우리반에서 제일 똑똑하고 운동을 잘하는 남학생인 유승이를 남자친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달님이와는 지나칠 정도로 말을 섞지 않는다는 게 느껴졌다. 달님이가 자기에게 먼저 말을 걸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다음 연재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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