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하루, 일상의 기록 ; 커피 한 잔과 함께 지나간 8시간
오늘의 기온은 14도.
아침에 눈을 뜨고 창문을 열자, 상쾌한 바람이 온몸을 스치며 밀려온다. 꿉꿉하고 눅눅했던 한여름의 열기는 어느새 자취를 감춘 듯하다.
계절은 이렇게 소리 없이 가을로 기울고, 하늘은 한층 더 푸르게 깊어지고, 구름의 모양도 바뀌기 시작했다.
아침 7시 55분
구글 앱을 켜고 직장까지 몇 분이 걸리는지 확인했다. 42분.
‘월요일인데 이렇게 막힌다고?’ 다시 지도를 보니 사고가 난 모양이다. 빨간 아이콘이 두 개나 떠 있었다.
출발과 함께 첫 번째 신호등에서 빨간불. 잠시 고개를 들어보니 하얀 구름 하나가 느긋하게 떠 있었다.
혹시 경찰이 있을까 두리번거리다가, 조심스레 핸드폰을 들어 후다닥 사진 한 장.
‘구름 너무 귀엽다.’
요즘 이곳 캐나다에서도 넷플릭스 ‘K-pop Demon Hunters’가 연일 1위를 차지하고, K-festival, K-Expo Canada 같은 행사들이 이어진다. 파리바게트엔 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라디오를 켜니 CBC에서 ‘Golden’이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다 보니,
어느새 사무실 앞에 도착.
오전 8시 50분.
회사에 도착하면 늘 하는 루틴이 있다. 커피 한 잔, 사과 반쪽, 삶은 달걀 하나. 오늘은 평소와 달리 과일부터 먹었다. 아삭한 사과 한 입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메일함을 열어보니 도착한 메일은 여섯 통. 많지 않다.
다음 주에 잡지 한 권을 마감해야 하는데, 아트 디렉터는 휴가차 이탈리아로 떠났다.
오전 9시 15분.
오늘도 To do list를 적어본다. 지금 내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네 개. 잡지 세 권과 Malta Book 디자인이다.
한국에서 광고대행사에 다녔던 시절엔, 그래픽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하는 다양한 시각 디자인 프로젝트들을 했다. 캐나다로 온 뒤에는 매거진 디자인이 내 주요 일이 되었다. 타이포그래피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지금의 일이 잘 맞는다. 그래서 일하는 게 나쁘지 않다.
사실, 일하는 강도는 한국과 비교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이다.)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산다는 건 간판, 인쇄, 종이, 사진, 광고주 미팅… 실무적인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했고, 직접 해야 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디자인’만 하면 된다. 얼마나 단순하고, 또 쉬운가.
물론 장단점은 있다. 캐나다에서는 디자인만 하니 지루할 때가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포토그래퍼, 메이크업 아티스트, 모델, 일러스트레이터, 카피라이터, 여러 협력업체들…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히며 배울 기회가 많았다.
외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에게는 반대인 것 같다. 오히려 한국에서 살아남는 게 더 힘들었다. 한국의 직장인으로 산다는 건 마치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것과 같았으니까.
오전 11시 20분.
동료가 여행에서 사 온 바르셀로나 에코백이 눈에 들어왔다. 색감이 참 예뻐서 잠시 어깨에 메어 보았다. 그 순간, 포토그래퍼인 동료가 카메라 셔터를 눌러 내 모습을 찍어 보내주었다. 작은 장난 같지만, 그 사진 속에는 오늘의 공기와 웃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잠깐의 수다와 간식 시간. 동료가 직접 구운, 견과류가 가득 들어간 빵을 건네주어 간단히 한 조각 베어 물었다. 바삭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지며, 일상 속 작은 여유가 선물처럼 다가왔다.
점심시간.
정해진 점심시간은 따로 없다. 나는 차에 기름을 넣으러 코스트코에 다녀왔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걸으며 친구와 통화를 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싸 온 샐러드를 간단히 먹고, 레몬티를 마시며 책상에 앉아 글을 썼다.
누구에게는 평범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나에게는 하루의 균형을 잡아주는 조용한 쉼표 같은 순간이다.
오후 1시 30분.
오전에 포토그래퍼와 촬영을 나갔던 카피라이터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동료이자, 하루 중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다.
카피라이터와 디자이너. 글과 디자인을 맡는 우리는, 페이지가 많은 매거진을 함께 만드는 일이 많다. 자연스럽게 협업도 잦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디어를 주고받는다.
그가 들려주는 커버 촬영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잠시 웃으며 나눈 뒤, 커버스토리를 어떤 글로 채울지 이야기를 들었다. 포토그래퍼와 함께 사진들을 고르고, 나는 그 이미지들을 서버에 차곡차곡 보관했다. 작은 반복이지만, 매거진의 완성도를 채워가는 중요한 과정이다.
오후 3시 40분.
이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애플워치에서 알림이 뜬다. “마음 상태 -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기록해 보세요.” 하루에 두 번,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마지막 알림까지.
나는 그때마다 잠시 손을 멈추고, 내 감정을 돌아본다. 오늘은 ‘약간 기분 좋음’을 눌렀다. 그렇게 쌓인 기록들은 차트로 남아, 내 하루와 감정을 가만히 보여준다.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이렇게 짧게라도 나를 들여다보는 순간이 있다는 게 참 고맙다.
오후 4시 50분.
동료들이 하나둘 퇴근 준비를 한다. 나도 일을 마무리하고 컴퓨터를 잠자기로 설정해 둔다. 내일 해야 할 일들을 To do list에 간단히 적어놓는다. 회사에서 보낸 8시간.
커피 한잔을 마시고, 동료들과 수다를 나누고, 가끔은 내 생각을 노트에 적는다. 그리고 즐겁게 매거진 디자인을 하며 하루를 채운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다.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Just as I am, S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