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웨이>의 신/창조주를 수용하는 세 가지 방법
어째서인지 <아티스트 웨이>에는 '창작'이라는 표현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보는 경당출판사 2012년 개정판, 임지호 번역자님 번역 버전에는 말이다. 대신에 쓰이는 말은 '창조'다. 그리고 거의 '위대한 창조주를 믿고 광명 찾으십시오' 급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조금 비뚠 독해라는 데 동의한다.)
도입부에서 '이 책의 과정을 통해 성과를 거두는 데에 신의 개념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p. 22), '혹시 신이라는 단어가 불편하다면, 이 말이 당신의 경험을 적절히 표현해주지 못한다면 굳이 쓸 필요는 없다. 믿지 않는 것을 믿는 척할 필요도 없다'(p. 22)라고 언급하기야 하지만 그뿐, 기본 원칙에 들어가자마자 은/는/이/가/이다만큼이나 '신', '창조주'라는 말이 숨 쉬듯 자주 쓰인다.
<아티스트 웨이>의 신은 크리스트교의 신이 아니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아티스트 웨이> 저자 줄리아 카메론은 서구 기독교 문화권 출신, 거주지와 주 활동지도 주로 그쪽이다. 그래서인지 전지전능하고 세상과 우리를 만들었으며 사랑하는 최고의 신이라는 <아티스트 웨이>의 신/창조주 개념은 유일신앙과 맞닿아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녀가 아티스트 웨이 소모임을 진행하면서 마주한 사람들은 보통 신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보다, 기존 신에 대해 가진 이미지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전부 그런 건 아니 지겠지만.) <아티스트 웨이>에서 신과 창조주에 대해 논할 때, 그녀는 '처벌과 규율의 제약하는 신' 관념을 버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안겨주고 내 창작을 북돋는 신'을 떠올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한편, 내게는 좀 다른 문제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무교다. 무신론을 맹신하면서 신앙인을 배격하는 건 반대한다마는, 유일신앙 문화권의 전지전능하고 선한 이 세계의 창조주 개념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은 이 세계를 창조한 궁극의 아티스트로, 우리를 만들 때 창조성을 부여했으며, 그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만든 신에게 할 수 있는 보답이다'라는 이 책의 기본 태제를 그저 '아하,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기는 일은 불가능했다.
믿지 않아도 된다, 진행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첫 주에 들어가기 전 매일 읽으라고 하는 기본 원칙에서부터, 항목 10가지 중에 6가지에 관련 개념이 사용되는걸! 그러니까 저자의 말은 신 개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안적 개념과 이미지를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신/창조성 자리에 넣어 읽을 수 있는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시오, ' 내게 추가 과제가 생긴 셈이었다. 나와 비슷한 이유로 <아티스트 웨이>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참고할 만할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후반에는 창조주 이야기가 많지 않은데, 초반에는 '기본 원칙'을 포함해서 '창조적인 긍정'이나 '길을 떠나기 위한 규칙' 선언문을 반복적으로 낭독하는 형식의 과제가 많았다. 읽을 때마다 '하지만 정합성이...', '하지만 설명력이...' 같은 내면의 조잘거림을 내내 들으며 진행할 수는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철학과였고, 보통 사상에서 신의 자리에 끼워 넣곤 하는 대체 개념 중에서 쉽게 납득한 것도 꽤 있었다.
나는 주로 '변화'를 넣어 읽거나, '자연'으로 부르기도 했다. 만상이 변화하며, 아름다움의 탄생도 변화의 일부라는 사실은 내게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 변화를 '스스로 된다'는 자연으로 부르는 것도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창조적인 긍정 2. 내 꿈은 신에게서 나왔고, 신은 그것을 이루게 할 힘을 갖고 있다.
-> 내 꿈은 내가 겪은 변화로부터 나왔고, 변화는 그것을 현실화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17. 나는 기꺼이 신이 나를 통해 창조하도록 할 것이다.
-> 나는 기꺼이 아름다움으로 가는 변화가 나를 통해 구현되도록 할 것이다.
길을 떠나기 위한 규칙 8. 위대한 창조주는 창조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명심한다.
-> 창조적인 변화는 가능하고, 여러 차례 실현되었으며, 내게서 일어나지 못할 필연은 없다.
길을 떠나기 위한 규칙 10. "위대한 창조주여, 얼마나 많이 할지는 제가 맡겠으니 얼마나 잘할지는 당신이 맡으소서."
-> "좋은 우연이 찾아올 수밖에 없을 때까지 계속, 수없이 많이 할 것."
'모든 것이 변화하며, 변화는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방향으로 열려 있다. 그중에는 아름다움으로 화하는 변화도 있다.'는 것은 내게 비교적 납득하기 쉬운 명제였고, '그런 종류의 변화를 겪어보고 싶다, '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면 내게는 그중 호의적인 우연이 왔으면 좋겠다' 하고 바라는 것도 당연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초반 단계에서는 논리적 사고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개념을 가공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계속 진행하다 보니 재고 따지고 치환하기도 번거로웠다. 무엇보다 기간제로 아침시간 아르바이트가 잡혀서, 모닝 페이지까지 쓰고 가려면 시간이 없었다. 아침은 바쁘고 졸렸다. 그래서 그냥 읽었다. 졸릴 때 읽거나 웅얼거리는 말은 의미를 담은 '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그저 음성이고 웅얼거림이다.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그만큼 저항감도 없다. 좀 멋있게 부르려면 반복 숙달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티스트 웨이>를 읽으면 읽을수록 여기서 말하는 창조주가 전통적인 신 관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은 예술적인 아이디어가 많고 행운을 쥐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돈과 세속적 성공도 많아서 '그거 나 주세요'하고 또랑또랑 말할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쥐여줄 수 있다. 6주 차에는 아예 이런 짤막한 시도 나온다.
'신은 예술을 좋아해.
그건 바로
우리 부모님이 무시하는 것.
신은 예술을 좋아해.
나도 예술을 좋아해.
그게 바로 신이 날 좋아하는 이유야.'
(p. 196)
어라, 특정 분야에 관심이 많고, 뭔가 플렉스 한 느낌이 나고, 나를 좀 편애하는 것 같고, 원하면 쥐여주는 신?
철학과 의식은 애진작 떠나간 지 오래였고, 그 자리에 슬그머니 웹소설 덕후가 나타났다. 너무 익숙한 개념을 떠오르게 하는 서술이었다. '이거, 그냥... 성좌 아님?'
별자리를 뜻하는 단어 '성좌'에서 발전한 이 표현은, 판타지 세계에서 신이 나 그에 준하는 권한을 얻은 존재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조금 더 유명해졌다. 대부분 왠지 주인공을 편애하고(<아티스트 웨이>의 신은 아티스트를 사랑한다), 주인공에게 위기를 극복할 아이템을 제공하며(창조적인 사치), 레벨업도 돕고, 스킬도 주고(예술적 성장), 진짜 비상사태에서는 개연성도 비틀어 주는(동시성) 모습으로 나타난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기도 하고, 너무 가벼워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또 이것이 의외로 그렇지가 않다.
'이 세상에 죽은 것을 살게 하고, 떨어지는 것을 날아오르게 하며, 있던 것을 없게 하고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 그래, 마법이 있다면 당신은 믿겠는가? 나도 한때는 믿지 않았다.'
라는 문장이 어느 책의 첫 문장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게 과학책이라면, 대체 어떤 이론과 실험과 근거를 가져와야 '사이비 과학' 꼴을 면할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철학서, 에세이, 무슨 장르든 저 문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건 사실 어떤 다른 개념을 소개하기 위한 비유였음'이라고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소설만은 다르다. 소설 독자의 기본 원칙은 '잠에서 깨어나니 커다란 바퀴벌레가 되어 있었다'부터 '눈을 떠보니 어린 시절 나로 돌아와 있었다', '2050년, 인류는 지구를 버리고 우주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갑자기 세계대전 20년 전 세상에 떨어졌다. 맙소사, 이런 일은 사학과 대학원생한테만 일어나는 거 아니었어?'라는 말들을, '아하, 그렇구나'하고 수용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어차피 <아티스트 웨이>는 진지한 놀이의 자세를 요구한다. 진지한 놀이라면, 덕후의 기본 소양인 과몰입만 한 것도 찾기 힘들다. <아티스트 웨이>를 따라 실천하려는 사람으로서 내게는 이 방법이 제일 잘 맞았다.
선행을 독려하는 전통적 종교를 생각해 보자. 세상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선행과 고행을 기꺼이 택하는 사람이 많다. 대체로, 보통의 셈으로 재고 따지면 뛰어들 만한 곳이 아니다. 그런데 선행은 세계에 필요하다. 그리고 선행을 하는 삶이 가치 있다는 건, 선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한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그렇게 행동하길 바라고 보상하는 신은 유익하다. 더 나아가보자면 세계에 필요한 선행자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선하기까지 한 개념이다. 세상에 대해 설명적으로 서술하는 차원에서 미심쩍은 구석이 있더라도 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어차피 <아티스트 웨이>를 펼친 사람이라면 창조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행복심리학을 살펴보면 창의성을 발휘하고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삶보다 즐겁고 행복하기에 유리하다. 그런데 우리는 확신이 없는 곳으로 뛰어들기를 무서워한다. 고민하는 데 에너지를 소모해 버린다. 끊임없이 망설인다. 행위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또 망설이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뿐이다.
그럴 바에는 이런 신이 있다고 믿는 편이 낫다. 모든 가능성을 너무 엄밀하게 검토하느라 직접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보다, 좀 부정확하더라도 내 도전을 사랑하는 신이 있어서, 내가 이 일에 뛰어들기를 원하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게 실천적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낫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시도를 하고, 기존의 틀 바깥으로 나와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관련된 정보와 기회가 더 많이 포착되고, 필요한 도움이 주어질 개연성이 높아진다고 한다면 그건 충분히 상식적이다. 아니면, 책에서 서술하는 방식대로 실제로 신이 돕는 것이든 간에... 그 둘 사이 행위 결과가 다르지 않다.
행위를 쉽게 이끌어내기 위한 믿음체계. 저자가 이런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작동원리가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내면의 신에게 의존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뜻이다.
(p. 176)
당신이 믿고 있는 신과 믿고 싶은 신에 대해 써보자. "신은 여성이고 항상 내 편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신을 에너지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를 최고의 선으로 인도하는 고귀한 힘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던 신에 대한 개념을 이제껏 한 번도 검토해보지 않았다면 아마 당신은 지금도 무서운 신의 개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섭지 않은 신은 당신의 창조적인 목표를 어떻게 생각할까? (p. 194, 볼드는 본문에 없는 나의 표시이다.)
-브런치북 <<아티스트 웨이>가 하라는 대로>는 2025.1.12 ~ 2025. 4. 21간 수행한 <아티스트 웨이>의 실천 기록을 응집하고 정제한 에세이 형태로 연재됩니다.
-더욱 생생한 날 것의 기록이 궁금하거나, '<아티스트 웨이>가 하라는 대로 하면 정말로 창조적인 예술가가 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엿보고 싶다면 아래 블로그로 놀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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