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8 작가 데뷔는 덤
군대에서도 반성문은 쓴다.
KRTC 3주 기간 동안은 정말 좋은 밥 먹고, 좋은 숙소에서 자고, 좋은 환경에서 운동하고, 미군과 미국 문화를 배우는데 정말 좋은 기회의 시간이자 축복의 시간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날의 과업을 한 후 자유시간에는 동기들끼리 같이 Canteen(PX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간단한 식사 및 한국식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다.)에서 라면이나 간단한 식사, 콜라도 마시며 일과 후 나름 그날의 피로도 풀고 또 한국 TV를 틀어 주시기 때문에 음악 프로그램도 듣고 (당시는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 이소라의 난 행복해 등이 자주 나오던 시절이었다.)
저녁 8시가 되면 문을 닫는데 사장님께서 하시는 말이 자기도 매출을 올리기 위해 더 장사하고 싶고 또 한국 교육생들에게 라면이라도 한 그릇 더 대접하고 싶지만 일하는 직원들도 근무시간이 있고 지켜줘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들에게 웃으시면서 양해를 구하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우리들은 아직 교육생의 신분으로 누구의 명령만 들었지, 우리의 협조를 구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인데 미군부대도 대부분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이 근무를 하기 때문에 Canteen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당시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없었지만 지금 돌이키면 일과 휴식 그리고 가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을 갖고 계신 것 같았다.
여하튼 그렇게 휴식과 식사를 끝내고 개인 정비를 마치면 점호를 마치고 침대에서 잠을 취하게 되고 논산에서와 같이 불침번을 선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끝낼 수도 있는데 꼭 몇 가지 사단이 발생하게 된다.
잠을 자는 도중 갑자기 Alert이 울리면서 불이 켜지고 모두 일어나게 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침대에서 뛰쳐나왔고 교관들도 배럭스 안에 이미 모여 있었다.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간을 하지 못했는데 Arlam이 더 크게 울리고 모든 교육생들이 깨어 집합을 한 후에 이내 소동이 잦아들었다.
원인은 동기 중 한 명이 복도의 소방함에 버튼을 눌렀던 것이고 작동이 되어 배럭스 전체에 크게 Arlam이 작동된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대체 왜 눌렀지?)
근데 더 심각한 사건이 며칠 뒤 또 발생했다. 이번에도 요란한 알람이 배럭스 전체에 울려 퍼졌고 이번에는 캠프 내 소방서에서 소방차까지 출동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다른 동기생이 이게 진짜 또 작동이 되는지 호기심에서 눌러봤다고 하는데 그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모든 동기생들이 잠을 설친 것을 둘째치고 소방차까지 출동한 것은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전체 얼차려는 없었다. 내가 느끼기에 분명 큰 사고이고 군기불량으로 인한 부주의로 인한 사고였던 것 같은데 이해를(?) 해주신 것인지 아님 고문관(?) 혹은 관심병사로 이해를 해주신 건지 모르지만 그 사태가 발생해도 불이익 같은 것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그 사건의 원인 제공자는 교관에게 징계를 받았는데 '반성문 1,000장 작성'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내 귀를 위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성문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지만 뒤에 붙는 1,000장?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것도 많은 시간을 준 게 아니라 내 기억에는 3일 주셨던 것 같다. 그럼 산술적으로 하루 333장 이상 작성을 해야 하고, 하루 24시간 중 자는 시간 6시간 제외, 식사시간 3시간 제외하더라도 최대 15시간을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작성한다고 했을 때 대충 시간당 20장 이상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건 뭐 도저히 할 수 없고 그냥 얼차려 받는 게 낫지 이걸 어떻게 할까? 하는 게 더 비정상적이라 생각하고 내 생각에 결국 하지도 못한 징계를 주면서 페널티를 심하게 주는 게 아닐까 하고 예상했다.
근데 더 놀라운 건 3일 만에 1,000장의 반성문을 완성하여 제출했다는 것이다. 교관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고 작성자는 덤덤히 써서 제출한 게 정말 내겐 쇼크였다. 뭐지? 저 인간들은 도대체 뇌구조가 어떻게 생겨서 돌아가는 거지? 나도 학창 시절에 반성문 써보긴 했지만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럴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반성하고 주의하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꼭 고치겠습니다' 보통 이런 잘못의 고백과 앞으로의 다짐을 그냥 반복적으로 써서 2-3장 써서 제출하고 몇 시간의 봉사(대부분 교실청소나 심하면 화장실 청소 그 정도?)
로 몸으로 때우는 결과를 나타내는데 1,000장의 반성문 (아니 소설을 써도 1,000장은 어렵겠다.)은 도대체 어떻게 쓰느건가?
나는 그 동기는 잘 알지 못했지만 너무 궁금해서 기회가 되었을 때 물어봤다. 도대체 어떻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1,000장을 작성할 수 있었는지 무슨 내용으로 채웠는지 나의 물음에 동기는 이렇게 말했다. 반성문 1,000장을 작성하기 위해 현재의 일어난 사건과 결과만 가지고는 절대 채울 수 없다고 그래서 본인은 본인이 태어나서 자란 내용, 자신의 성장기, 어렸을 적 하고 싶었던 일,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중학교 시절의 꿈, 고등학교에서의 진학 문제, 대학에서의 학창 시절을 끌고 와서 기-승-전-반성문으로 내용을 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순간 그 말을 듣고 또 2차 쇼크를 먹었다. 뭐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놈은? 진짜 괴물인가? 진짜 난놈은 이런 것일까? 괴짜인가 아님 천재인가?
소방벨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나 테스트 한 고문관, 관심병사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반성문 1,000장을 3일 만에 완성한 괴물 같은 놈으로 더 강하게 뇌리에 박혔다. (그렇다고 이제 제발 사고는 치지 말자 동기야)
공중전화는 늘 가까이 있었다.
캠프 안에는 각종 다양한 편의 시설이 있다. 앞에서 고난의 500 지역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볼링장도 있고, 극장도 있고, Canteen, PX, 도서관, 세탁소 뭐 기타 등등 일반 사회에 있을만한 시설들은 다 있다. 다만 우리들은 아직 교육생이고 군인이기도 해서 이런 시설들을 이용하는데 자유롭지 못하다. 그중에 공중전화도 마찬가지이다. 논산에서도 그렇지만 공중전화는 기간병들만 사용이 가능했고 외부와의 연락을 일절 하지 못했다.
카투사 교육을 받고 있는 동안에도 오직 편지만 이용 가능했고 비록 공중전화가 지근거리에 있었지만 사용을 하지 못하게 했고 또 그게 당시는 크게 불편함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은 한국군도 마찬가지로 훈련을 받거나 교육생의 신분에서는 사용하는데 분명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또 몇몇 동기들이 자유시간에 교관의 눈을 피해 몰래 공중전화를 사용하다가 발각이 되어 배럭스로 런하다가 걸려서 또 전체가 집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면 꼭 보상심리 때문에 나도 전화를 사용하다 차라리 한번 더 걸리고 말지, 나만 지키다가 남이 사용하다 걸려서 함께 얼차려 받는 것을 부당하게 느끼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그 이후에도 몇 번 동기들이 전화를 사용하다 걸려서 그때마다 단체로 얼차려 받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도 난 참 굳이 전화를 해서 (아님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 맞겠다) 문제를 일으켜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들고, 아날로그적 감성이 있는지라 편지를 주고받고 하는 게 더 좋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전화에 대한 욕구는 별로 없었다. (아니면 진정 내 안에 혹시나 나도 반성문 1,000장을 쓸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중에는 교관들이 공중전화 사용하다 걸린 동기는 얼차려도 받고 또 반성문도 똑같이 쓰게 했다. 하지만 이미 노하우가 동기들에게 퍼진 사이라 어렵지 않게(?) 1,000장을 채우게 되는 기적이 쉽게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도 이게 무슨 구타나, 모욕적인 언사나, 심각한 징계 없이 나름 신사적(?)인 페널티가 한국군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가 아닐까 생각도 들었고 정말 미군처럼 모병제로 월급을 받고, 급여 삭감, 진급 누락이라는 심각한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을 가장 큰 페널티로 여기는 미군의 입장으로 바라보면 충분히 납득이 되는 페널티와 징계로 본인의 잘못을 확실히 깨닫게 하는 것이 더 마음에 와닿지 않나 싶다. (물론 난 맹목적인 미국의 것을 좋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배울 점이 많고 합리적인 문화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러면서 나는 또 한 단계 마음과 몸이 성장하게 되는 것을 느낀다. 논산에서의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적지만 정신적 한계는 더욱 뛰어넘게 되는 문화 충격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