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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탓도 유전이 될까요

이혼일기, 여덟 번째 상담 episode 1.

by 검정멍멍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한 주간 잘 지내셨죠?


─네. 어서 오세요.


─지난주 목요일에 부모님 댁에 찾아가 대화를 했어요. 좀 갑작스럽긴 했는데 <화해>라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이상 부모님과의 대화를 미루지 말아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더군요. 20년 동안 가슴속에 박혀있던 칼을 뽑아 든 거죠. 대화의 결과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어쨌든 뭔가 조금 '심플해진 것' 같아요.


다음 말을 어찌 이어갈지 몰랐다. 침묵이 이어졌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 사이 분침은 12에서 1을 향해갔다.


나의 들숨과 날숨 그리고 선생님의 기다림이 이어졌다.




─요즘은 딸이랑 가급적 더 많이 스킨십하고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거 말고는 떠오르는 말이 없네요.


선생님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상황이 어색해진 나는 자욱한 안개를 손으로 걷어내듯,
침묵을 깨고 말을 이어갔다.



─꿈꾸신 거 있으세요? 기억나는 거?


─꿈은 기억이 안 나요 그러니까 꿈을 몇 개 정도 꾼 거 같은데 상담하는 기간 동안에 잘 기억이 안 나요.


─부모님이 얘기하고 나니까 마음이 어떠시던가요?

─굉장히 다양한 감정을 느꼈어요.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아버지한테 오랜만에 쌍욕을 먹었거든요. 하하.


─뭐라고 욕을 하셨어요?


─뭐 똑같죠. 맨날 하는 저주 같은 욕들을 뱉어내셨죠. 혼자 화를 주체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늘 그랬던 것처럼 "씨발! 병신 같은 새끼"하며 막말을 토해냈어요.


익숙한 듯 또 너무 오랜만에 듣는 욕이라 아주 어색했던 그날밤이 떠올랐다. 선생님에게 설명한다는 이유로 회상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에는 결코 마주한 감정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어릴 때 좀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그러세요?


─네. 대화를 시작한 지 5분도 안돼서 갑자기 "진짜 짜증 나네." 하면서 말을 다 끊더라고요. 결국 "나는 너네 할아버지랑 안 그런 줄 아냐!"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셨고요. 아버지가 집안 빚을 모두 다 갚았거든요. 나름 괴로웠던 환경이 있었던 건 알고 있었지만 제가 그런 얘기를 하자고 간 건 아닌데 갑자기 흥분을 하더니 막 울분을 토하시더라고요.


─아버지 본인조차 해소되지 않은 뭔가가 많으신가 봐요.

─아마... 그러시겠죠. 여하튼 처음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땐 그저 아버지에게 화가 났어요. '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구나, 변하지 않는구나' 싶었죠. 동시에 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어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가고 엄마랑 둘이 얘기하면서 잠시 아빠에게 연민이 느껴졌거든요. 어찌 보면 아빠도 '불쌍한 사람'일 수 있어요. 참 고달픈 인생이었겠죠. 그러니 이제 와서 갑자기 20년도 넘은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는 것 자체가 아버지 입장에서는 제가 찡찡거리며 어리광을 부린다고 느꼈을 것 같기도 해요.


─네...


─여하튼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도 말씀드렸던 "아무 이유 없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났던 사연"부터 대화를 시작했어요. 나 어렸을 때 아무 이유 없이 집에서 왜 내쫓았냐고 부모님께 여쭤봤더니 두 분 다 기억이 없다고 하셨어요. 저에게는 꽤나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었는데 딱히 기억을 못 하시는 게 꽤 충격적이었어요. 그 사연과 더불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몇 가지가 있는데... "아빠가 저에게 화를 낼 때마다 뭐라고 해서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니까, 애한테 그러지 말라고 그러면 오히려 더 미쳐 날뛰고 화를 내니까 그냥 가만히 있었대요. 근데 그 말을 듣는데 엄마한테는 화가 나더라고요. '야... 아무리 아빠 성격이 이상하다고 해도 엄마도 너무하네. 진짜... 어떻게 그냥 방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전혀 기억 못 하는 몇 가지 사연들을 더 얘기해 주셨어요. 아빠가 저를 방에 데리고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한참을 혼냈데요. 칼처럼 생긴 날카로운 걸 가지고 혼내는 상황이어서 엄마가 문 밖에서 울면서 하지 말라고 말려도 문도 안 열어주고 계속 혼냈던 때도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언제쯤 일이에요? 아주 어릴 때 이야기인가? 아니면 학교 다닐 때쯤?


─제가 아예 기억 못 하는 거 보면 거의 뭐 초등학교 이전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 얘기를 듣는데 문득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를 보호할 능력이 없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처음에는 화가 났는데 나중에는 결국 '그래, 엄마는 뭐...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하며 체념하는 제 자신이 가엽더군요. '그래도 그런 일을 제외하면 '엄마는 언제나 나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준 사람이니까 고마운 사람이지, 그래서 참 다행이다.' 하며 한참을 스스로 위로하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원래는 그날밤 부모님 댁에서 자려고 했었는데 돌아오는 버스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와... 나에게 집은 뭘까?

부모님 집도, 내 딸과 법적 배우자가 살고 있는 집도
모두 내 집이 아닌 이 느낌은 도대체 뭘까?

결국 나는 어디에도 집이 없네?'




─어쨌든 부모님과 대화를 시도했다는 게 저에겐 아주 큰 발걸음이었어요. 그래도 '심플해졌다.'라고 아까 말씀드린 이유는, '가족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한 지가 꽤 오래됐거든요. 그러면 나의 원가족과 잘 지내고 싶은 욕심을 부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엄마나 아빠 모두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이고 쉽게 변하지 않을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예전 이야기를 하며 잘 풀어가 보려고 시도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마음조차 결국 '큰 욕심이었구나, 나는 정말 큰 용기를 내서 얘기를 했는데 결국에는 똑같구나.' 이게 결론인 것 같네요...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번 좌절감을 느끼거나, 억울한 감정은 전혀 없고요. 그냥 인정했어요. '그래... 안 되는구나. 내 원가 족하고는 내가 원하는 가족의 모습처럼 살 수는 없겠구나. 이번 생에서는 힘들겠구나...'

─한편으로는 잊고 살았던 분노도 떠올랐어요. 아버지에 대한 분노. '그래 저 인간 내가 어렸을 때부터 죽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었지... 또 우리 엄마의 행복을 계속 파괴하는 행태를 이제 그만하고 차라리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저주하며 살았던 때가 있었는데 그걸 완전히 잊고 살았더라고요. 아버지가 오랜만에 대놓고 쌍욕을 하는데 예전 그 감정이 떠오른 거죠. 그래도 분노가 저를 잠식하게끔 또 두진 않았어요.


─......


─'그래 본인 인생도 충분히 괴로웠겠지 그리고 나를 딱히 부족함 없이 대학까지 지원해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게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 한 거니까, 차라리 그런 감사한 일에 집중하자. 그 정도만 해도 훌륭하지 뭐. 내가 인격적으로 성숙한 아버지를 바라는 거는 무리고, 그냥 저렇게 살다가 돌아가실 분이니까 내가 이 정도 노력했으면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낸 거다.' 하며 저를 토닥였어요. '예전 일로 아직도 속상한 마음이 있어 털어놓고 잘 지내고 싶다. 두 분께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대화를 시작한 건 아니다.'라는 얘기를 처음에 먼저 인지하고 대화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그렇게 미쳐 날뛰는 거 보면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체념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예전부터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잊고 살았음을 자각했어요. 불쌍하고 연민도 느껴졌고요. 동시에 엄마에게도 그런 아빠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분노도 느꼈고 동시에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서 참 인생이 안타깝고 불쌍한 우리 엄마 어쩌나 싶기도 하더군요.


─잠시 한숨 좀 돌리실까요?


─아... 제가 좀 흥분했나요?


아뇨. 그냥 조금 천천히 설명해 주시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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