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긴 그날의 총성은 단지 한 독재자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신 체제라는 거대한 구조에 균열을 낸 윤리적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 선언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우리는 김재규의 출생과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태어난 1924년은 일제강점기의 한복판이었고, 그의 뿌리는 구한말의 격동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김재규라는 인물은 단지 한 시대의 정치적 행위자가 아니라, 조선의 몰락과 식민의 굴욕, 그리고 민족의 윤리적 질문을 품고 자라난 존재였다. 그의 결단은 그 뿌리에서 비롯되었고, 그 뿌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총성과 붓글씨를 온전히 해석할 수 없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면서 조선은 마지막 자존의 시대를 맞이했다. 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고 호포제를 실시하며 양반 중심의 질서를 흔들었다. 그는 경복궁을 중건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외세의 침입에 맞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저항했다. 그러나 쇄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원군의 퇴진 이후, 조선은 개항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일본과의 불평등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연달아 일어났고,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은 조선을 외세의 무대로 만들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민중의 절규였지만,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며 조선은 더욱 깊은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 조선은 근대화의 물결과 전통의 저항 사이에서 갈등했고, 결국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체제를 선포하게 된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철도와 전신,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며 자주적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외세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했다. 안중근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하며 민족의 절규를 세계에 알렸지만, 그 외침은 곧 식민의 굴레로 이어졌다.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대한제국은 소멸했고, 조선이라는 이름은 식민지 행정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했다. 이 시기 조선의 민중은 언어와 이름, 교육과 문화에서 일본의 억압을 받았고, 민족의 정체성은 점차 침묵 속으로 사라져갔다.
1924년 4월 9일, 김재규는 경상북도 선산군 이문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김녕이며, 조선 말기의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부친 김형철은 유교적 가풍을 중시한 인물로, 조선의 윤리와 질서를 김재규에게 전수했다. 모친 권유금은 조용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김재규의 내면에 침묵과 결단의 씨앗을 심었다. 그는 7남매 중 하나로 태어나 형제들과 함께 전통적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유년기는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에서 펼쳐졌지만, 그 안에는 구한말의 잔향이 살아 있었다. 그는 안동농림고등학교와 대구농업전문학교에서 근대적 지식과 전통적 윤리를 동시에 흡수했다. 일제의 식민 교육 속에서도 그는 민족적 자각과 윤리적 질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의 침묵은 단순한 순응이 아니었고, 그의 결단은 그 침묵 속에서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