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 2025년 9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말한다. 자유를 외친다. 그러나 그 자유의 뿌리를 꿰맨 이들의 이름은 여전히 침묵 속에 있다. 김재규와 장준하. 한 사람은 총을 들었고, 한 사람은 붓을 들었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독재에 맞섰고,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교과서에서 사라졌고, 기념비에서 제외되었으며, 언론과 정부, 국민 모두가 외면했다. 이 기획은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들을 잊은 자들을 향한 윤리적 질문이다.
장준하는 독립운동가였다. 일제강점기, 그는 만주로 건너가 광복군에 합류했고, 해방 후에는 언론인으로 변신했다. 1953년, 그는 ‘사상계’를 창간하며 지식인의 길을 걸었다. 그의 글은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박정희 정권은 그를 경계했다. 1975년 8월, 그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정부는 “실족사”라 발표했지만, 그의 유족과 동료들은 “타살”이라 믿었다. 시신은 부검되지 않았고, 죽음은 조사되지 않았다. 그의 붓은 꺾였고, 그의 이름은 침묵 속에 묻혔다. 그의 묘는 파주에 있다. 단정한 묘역, 조용한 바람. 그러나 그곳을 찾는 이들은 드물다. 민주주의를 누리면서도, 그 민주주의를 꿰맨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재다.
김재규는 군인이었다. 육사 출신, 3군단장, 중앙정보부장. 그는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고, 유신체제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체제를 꿰매려 했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총을 들었다. 1979년 10월 26일, 그는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를 사살했다. 그 총성은 독재를 겨눴고, 침묵을 깨웠다. 그는 “민주화를 위한 결단”이라 말했지만, 재판은 그를 반역자로 몰았다. 재심은 없었고, 재평가는 미뤄졌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삼성공원묘역 언덕 위에 있다. 비석에는 총탄 자국 여섯 개가 박혀 있다. 그것은 단지 돌에 남은 흔적이 아니라, 시대가 남긴 상처다. 그는 민주주의의 문을 열었지만, 그 문 너머로 들어간 이들은 그를 잊었다.
언론은 침묵했다. 장준하의 죽음은 “실족사”로 보도되었고, 김재규의 결단은 “권력투쟁”으로 축소되었다. 그들은 질문하지 않았고, 조사하지 않았고, 기억하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의 입을 대신했고, 국민의 눈을 가렸다. 1980년대, 언론은 전두환의 입을 따라 움직였다. 장준하의 이름은 교과서에서 사라졌고, 김재규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그들의 이름은 복원되지 않았다. 언론은 “민주화”를 외쳤지만, 그 민주화의 씨앗이 된 두 사람을 외면했다. 2020년대의 언론 역시 다르지 않다. 김재규의 재심은 다뤄지지 않았고, 장준하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언론은 침묵했고, 그 침묵은 공모였다.
국민은 잊었다. 장준하의 글을 읽지 않았고, 김재규의 총성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역자”라는 낙인을 받아들였고, “실족사”라는 해명을 믿었다. 그들은 침묵했고, 그 침묵은 무관심이 되었다. 그들의 무덤은 조용했고, 그들의 이름은 낯설었다. 민주주의를 누리면서도, 그 민주주의를 꿰맨 사람들을 외면했다. “의(義)”를 말하면서도, 그 “의”를 실천한 사람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념일에 태극기를 들었지만, 그 태극기를 꿰맨 손을 보지 않았다.
정부는 침묵했다. 장준하의 죽음은 재조사되지 않았고, 김재규의 재심은 기각되었다. 그들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말하면서도, 그 역사의 중심을 비켜갔다. 기념비를 세우면서도, 그 기념비에 두 사람의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 민주화 유공자 명단에서 김재규는 제외되었고, 장준하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은 “국민통합”을 말하면서도, 그 통합의 씨앗을 외면했다. “의(義)”를 말하면서도, 그 의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 2025년 현재, 정부는 여전히 두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침묵했고, 그 침묵은 회피였다.
장준하의 아들 호권은 김재규의 유족을 만났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시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시대의 고통을 함께 껴안았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김재규 선생을 존중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장준하 선생을 존경했습니다.” 그 말은 단지 예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를 관통한 윤리적 유산이었다. 호권은 제안했다. “두 분을 함께 묻읍시다. 그들의 침묵을 하나로 꿰맵시다.”
합장은 단지 무덤을 함께 쓰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윤리를 하나로 묶는 일이었다. 침묵과 결단, 붓과 총, 유교적 윤리와 민주화 정신이 교차하는 자리. 그 무덤은 단지 흙이 아니라, 시대의 증언이었다. 유족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조용하지 않았다. 합장은 논쟁이 되었고,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재규는 반역자다.” “장준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합장은 이뤄지지 않았다. 논란은 커졌고, 유족들은 상처를 입었다. 김재규의 아들은 다시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호권은 파주의 묘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무덤 앞에 앉았다. “아버지, 저는 실패했습니다.” 그 말은 바람 속으로 흩어졌고, 나무는 말이 없었다.
합장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시작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질문이었다. “우리는 그 침묵을 이어받을 수 있는가.”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김재규와 장준하.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은 외침이었다. 그 외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홀로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