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와 장준하. 한 사람은 총을 들었고, 한 사람은 붓을 들었다. 그들은 독재에 맞섰고, 민주주의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언론은 그들을 영웅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이름은 ‘논란’, ‘의문’, ‘밀약’, ‘권력투쟁’이라는 단어들과 함께 등장했다. 왜 언론은 그들을 불편해했는가? 그들이 가진 윤리적 복잡성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흔들어버린 국가 서사의 균형 때문인가?
1975년 8월, 장준하는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정부는 “실족사”라 발표했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썼다. 부검은 없었고, 의문은 남았지만, 언론은 질문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비운의 지식인’으로 포장되었고, 그의 정치적 투쟁은 ‘과격한 반정부 활동’으로 축소되었다. 그가 준비하던 ‘8월 거사’는 음모론처럼 다뤄졌고, 그의 붓은 ‘불안한 급진성’으로 해석되었다. 언론은 장준하를 기억하지 않았다. 기억하더라도, 그를 ‘위험한 인물’로 묘사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박정희를 사살했다. 그는 “민주화를 위한 결단”이라 말했다. 그러나 언론은 그를 ‘권력투쟁의 주역’으로 규정했다. “중정 내부의 암투”, “정권 내 갈등”, “정신적 불안정” 그의 결단은 정치적 동기보다 개인적 충동으로 해석되었다. 그의 재판은 공개되지 않았고, 그의 진술은 왜곡되었다. 언론은 김재규를 반역자로 만들었다. 그의 총성은 민주주의의 문을 열었지만, 그 문 너머로 들어간 언론은 그를 닫아버렸다.
2000년대 이후, 일부 언론은 김재규와 장준하 사이의 ‘밀약설’을 보도했다. “두 사람은 유신체제 타도를 위한 거사를 함께 준비했다.” “장준하의 죽음은 그 거사의 좌절이었다.” 그러나 이 보도는 ‘음모론’의 형식을 띠었다. 증언은 가족과 지인에 의존했고, 사실 확인은 부족했다. 언론은 이 밀약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소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윤리적 연대는 조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 꿰맸지만, 언론은 그 꿰맴을 찢었다.
1987년 이후,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언론은 김재규와 장준하를 복원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은 교과서에 없었고, 기념비에도 새겨지지 않았다. 김재규의 재심은 다뤄지지 않았고, 장준하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았다. 언론은 “민주화”를 외쳤지만, 그 민주화의 씨앗이 된 두 사람을 외면했다. 왜 그들은 복원되지 않았는가? 그들이 가진 윤리적 복잡성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국가 서사의 균열을 드러냈기 때문인가?
언론은 기억을 선택한다. 기억은 권력이고, 서사다. 장준하의 붓은 ‘과격한 지식인’으로, 김재규의 총은 ‘불안정한 반역자’로 그려졌다. 그들의 윤리는 복잡했고, 그들의 결단은 단순하지 않았다. 언론은 단순한 영웅을 원했고, 복잡한 인물은 불편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워졌다. 기억되지 않았고, 기념되지 않았다.
김재규와 장준하.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은 외침이었다. 언론은 그 외침을 듣지 않았다. 국민은 그 외침을 이해하지 않았다. 정부는 그 외침을 기록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외침을 꿰맬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다시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윤리를 다시 꿰맬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