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건데 선물을 받았다.

토성역까지 갑니다.

by 빛나다온

부산의 도로는 베테랑 운전자에게도 힘든 길이라던데 하물며 길치인 나에게는 오죽할까.

타지에서 자취하는 딸아이가 친구를 만나러 나간 사이 나는 낯선 부산 땅에서 비장한 결심을 했다. 혼자서 감천문화마을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여가 그리고 운전대보다 마음 편한 지하철이었다.

그때까진 민망함의 가시방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시청역에서 다대포해수욕장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주말의 지하철 안은 빈틈없이 꽉 차 있었지만 운 좋게 내 앞에 앉은 분이 하차하면서 빈자리가 바로 났다. 앗싸! 횡재했다 싶어 엉덩이를 붙인 것도 잠시 두 정거장 뒤에 부전역에서 인상 좋으신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가 타셨다. 조금 굽은 할머니의 허리를 보자마자 내 무릎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여기 앉으세요."
손사래를 치는 할머니가 맘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저는 금방 내려요. 앉으세요."

"하하 이렇게 고마울 데가."

내 목적지가 한참 남았다는 사실은 잠시 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으니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며 환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배려는 당연하고 단순한 호의가 될 줄 알았다.

서서 핸드폰으로 브런치 독자모드 삼매경에 빠질 동안 한 정거장, 두 정거장... 열차는 달리는데 나는 내릴 기미가 없었다.

잠시 후 지하철의 소음을 뚫고 저쪽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바로 안 내리면서 자리 양보해 준 거였어? 아가씨, 고마워서 어떡해!"


'아가씨'라는 단어에 광대가 승천할 뻔했지만 아마도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었으리라 짐작한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황해서 보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리면서 핸드폰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실수까지 했다.


머쓱한 웃음과 함께 난 '괜... 괜찮아요'라는 짧은 대답만 반복할 뿐이었다.


부산진역 근처에 다다랐을 때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서 계셨다. 할아버지는 멀리 떨어진 나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봐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니, 아가씨 왜 또 안 내려? 아휴, 마음도 착하지. 요즘 이런 사람 없는데..."

할아버지의 칭찬은 앙코르 곡처럼 멈추지 않았다. 얼굴은 화끈거리고 도망치기엔 지하철 안엔 사람도 너무 많고 비좁았다. '그냥 다음 역에서 내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부산의 미로를 헤맬 용기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꿋꿋하게 버텼다.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의 감동은 정점을 찍었다.

"아가씨 어디까지 가요?"
"저... 저는 토성역요..."
"자갈치역에서 내리는 우리보다 더 멀리 가면서 양보를 한 거요? 아이고 세상에 고마워서 어쩌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자갈치역에서 내리는 그 순간까지도 문이 닫힐세라 고개를 숙이며 연신 인사를 건네셨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 진심 어린 목소리가 길게 여운을 남겼다. 할아버지까지 앉아서 가셨으면 좋았을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마침내 도착한 토성역. 역사를 빠져나오며 친절을 베풀려다 어쩌다 보니 어르신께 공식 천사로 강제 등극해 버렸다는 것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예상치 못한 민망함이 밀려왔지만 마음만은 감천문화마을의 풍경처럼 알록달록 예쁜 무지갯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리 양보 하나에 이토록 마음을 다해 고마워하시는 겸손한 어르신들을 만나다니 오히려 내가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부산 사람들의 정은 도로의 악명보다 훨씬 깊고 따뜻했다. 친절이 지닌 다정한 무게를 조금 더 묵직하게 실천했더라면... 그분들께 조금 더 다정한 웃음을 건네지 못한 아쉬움을 갈무리하며 다음에 마주할 인연에게는 조금 더 넉넉하고 따뜻한 진심을 전해보려 한다.

감천문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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