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들의 밤마실

by bony

우리 엄마들의 모임이 결성된 지 얼마 안 된 무렵이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였다.


Z엄마(왕언니)의 남편분이 출장을 갔다.

언니는 우리 ○○동 모벤져스를 늦은 밤 초대했다.

우린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인 언니의 집으로 설레는 맘으로 급히 날아갔다.

밤 10시쯤이었다.

밤마실이라. 얼마 만에 느껴보는 자유인가? 친구네 집에서 시험공부를 핑계로 밤새 이야기하면서 놀 던때가 생각이 났다.

그날의 밤공기는 달콤했다. 이상하게도 고요한 밤은 나를 차분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우리가 언니네 집에 들어갔을 때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형형색색의 요리를 보았다. 너무 행복했지만, 다음엔 내 차례 일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각종 술을 좋아하는 언니답게, 언니는 수도꼭지가 달린 대형와인도 준비했다. 언니는 예쁜 그릇을 모으는 게 취미였는데, 특이한 와인잔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심지어 신발모양의 잔도 있었다. 착석을 한 뒤, 우리는 이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자세한 속사정이나 사연은 잘 몰랐었다.

그래서 그날은 아이들도 없고 해서 더욱더 심도 있는 대화를 했다. 서로를 잘 알아가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난 근래에 돌아가신 엄마얘기를 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 쭉 둘러보았는데 M엄마와 H엄마가 순식간에 눈이 빨개지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곧 울 것 같았다. 더 이상의 심각한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한두 시간이 흘러갔다.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리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닌 데다, 나이도 이팔청춘도 아닌 거의 반 접은 백 살이라 밤을 새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밤새서 이야기할 것 같았다.


시간이 더 흘러서 취기가 올랐는지, 아님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T엄마가 갑자기 H엄마를 보고 비싼 개를 닮았다고 놀리기 시작했다.

H엄마는 서양인 같은 높은 콧대가 매력적인 엄마이다.

"잘 봐봐요, 있잖아요. 그 개! 바텔인가 그 전화기 옛날에 광고에 나왔던 그 코가 오뚝한 개. 그 개 이 언니 닮지 않았어요?"

긴 단발머리는 순간 그 바텔 전화기 광고 속의 그 개의 귀와 닮아 보이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특히 그 코가 똑같았다.

부인할 수가 없었다.

H엄마는 웃으면서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어... 자기도 개 닮았는데... 왜 얼굴에 주름이 많은 토동토동한 그 개... 불도그.."

진짜 닮았다. 하하하... 크게 웃으면 실례인데 배가 아플 정도 웃었다.

그런데,

그 화살이 내게로 꽂혔다.

"어.. 잠깐만... 이 언니도 그 개 닮았다. 왜 작고 마르고 눈 큰 개 있잖아요... 뭐였더라... 앗... 치와와... 풉"

남이 당할 땐 재밌었는데, 내가 당하니 처음엔 기분이 가히 좋지는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닮았다.


이렇게 웃고 떠드는 중, 급 심한 피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쯤이었다.

내 눈꺼풀이 자연스럽게 내려가고 엄마들이 말하는 대화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집중이 흐려졌다.

당연히 열심히 떠들던 내 입도 아주 무거워졌다.

결국엔 나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H엄마가

"언니, 왜 이렇게 말을 안 해? 입을 열어?"

하고는 두 손으로 내 입을 진짜로 열었다.

"내가 좀 피곤해지네..."

난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집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언니, 힘들면 누워! 누워서 얘기하면 되지! 나도 피곤한데 버티는 거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우리가 늦게까지 놀겠어?"

이건 아닌데...

그냥 집에 가는 걸 포기했다.

이 엄마들을 이길 재간이 없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 새벽 4시가 되었다.

그런데 엄마들의 수다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이젠 슬슬 얘깃거리가 떨어질 만도 한데, 엄마들은 이제 정치부터 연예계까지 토론의 장을 펼쳤다.

소피스트 같다.

대화가 끝이 없다.

그런데 졸리던 내 눈이 새벽 4시가 넘어가자 번쩍 뜨였다. 뭐지? 잠이 달아났다. 이건 옛날에 시험기간에 밤새서 공부한다고 타이밍이라는 각성제를 먹은 적이 있었는데 딱 그 느낌었다. 피곤한데 잠은 안 오는 기이한 현상이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엄마들의 이야기는 이제 방과 후 수업에 다다랐다.

주산을 배워야 머리도 좋아지고 계산도 빨라진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몇몇 엄마들은 본인도 주산을 배운 적이 있다며 으스댔다. 결국 서로 주판을 튕겨가며 계산을 하는 경연대회 같은 것이 벌어졌다.

나도 왕년에 주산을 배운 적이 있길래,

주판을 튕겼는데, 손을... 심하게 떨었다.

내 손인데 통제가 되지 않을 만큼 심하게...


무서웠다...

난 손을 떨어서 안 되겠다며 말하고는 언니의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다음 날, 놀랍게도 나를 제외한 모든 엄마들이 밤을 새웠다는 얘기를 들었다.

keyword
이전 04화국제언어체험센터에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