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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의 여왕 2

by bony

"마인드 리더라니! 정말 대단해!"

엠마가 혼자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동안 기사들은 다시 까마귀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소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맞다! 밧줄을 풀어줘야겠다! 여기서부터는 절대로 도망갈 수 없으니..."

두 손의 자유를 얻은 엠마는 이 대단한 소녀의 뒤를 군말 없이 따라갔다. 처음 느꼈던 느낌과는 달리 궁전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그것은 바로 어릴 적 젖냄새나는 엄마의 품에서 나오는 온기 같은 것이었다. 평소 낯선 장소를 두려워하는 엠마는 이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납치를 당해서 왔는데 평온함을 느끼다니! 곧 엠마는 기나긴 회색빛의 동굴과 같은 궁전의 복도를 지나갔다. 엠마는 은은한 달빛아래에 평화로운 시골길을 걷는 듯했다. 정확히 어릴 적 외할머니댁에 가는 그 시골밤길.

'길 양옆으로 강아지풀이 내가 왔다며 꼬리를 살살 흔들며 반가워했었지. 반딧불이도 장작불에 불꽃이 튀듯이 비행을 하며 날아다녔고. 엄마는 몸 약한 나를 업고 이안을 한 손에 잡고 걸어갔었어. 내겐 놀이기구 타는 것만큼이나 즐거웠던 어부바! 엄마의 넓은 등은 내 놀이터였는데...'


복도에서 나오니 높디높은 천장이 엠마를 짓누르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궁전의 거대한 내부가 주는 위압감에 엠마는 초라해졌다. 그리고 앞쪽에 왕좌에 앉아 있는 여왕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왕좌주위에는 타원형의 조형물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수많은 까마귀 동상들이 있었다. 간혹 가다가 흰색의 까마귀도 보였다. 엠마의 시야에 여왕의 모습이 더 정확히 다가와 꽂혔다. 여왕은 품위가 충만한 생명체였다. 그리고 고고한 자태로 엠마를 인자하게 내려다보았다. 여왕은 머리에는 금빛의 화려한 왕관을 쓰고, 흰색 드레스에 빨간색의 독특한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여왕에게서 나오는 후광은 눈이 부셔서 시력을 앗아갈 정도였다. 또한 내면에서 풍겨 나오는 따스함과 외면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은 온전히 여왕의 것이었다. 그런데 엠마에 눈에 여왕의 흰 드레스에 붉은색 무늬가 합쳐져 배 쪽으로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붉은 무늬는 강렬한 핏자국과 같은 형상으로 변했다. 엠마가 반복돼서 꾸는 엄마에 대한 그 악몽의 한 장면이 분명했다.

'불쌍한 내 새끼'

엄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 엠마는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았다.

엠마는 찰나에 환각과 환청을 생전처음으로 경험했다.

여왕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평온하게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하나 들고 검지손가락으로는 흰 까마귀를 받치고 있다. 여왕이 흰 까마귀를 퉁쳐 위로 날려 보내자 타원형의 조형물에 앉았다. 그리고는 곧 돌처럼 굳어버리면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이 연기가 휘리릭 났다. 그 연기는 궁전 벽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엠마가 고개를 들어 그쪽을 보니, 코니기사단처럼 보이는 기사들 네 명이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장면이 빛으로 새겨졌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 기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여왕 폐하! 분부하신 대로 여기 그 여자를 데려왔습니다."

"기사단들에게 좀 전에 보고를 받았다. 수고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엠마입니다."

"그래 이미 알고 있었지만 확인차 물어보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겠구나?"

"아 네..." 엠마는 감정을 삼키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다는 걸 충분히 안단다. 하지만 곧 너도 적응할 것이야. 우리는 너의 대단한 잠재력을 보고 너를 골랐다. 는 정말 특별하다. 그리고 너만 온 게 아니란다. 바로 네 옆에 있는 레이도 내가 고른 인재 중 하나지. 레이의 마인드리더의 능력을 보았느냐? 이제 차차 소름 끼치는 능력에 감탄하게 될 것이야. 처음부터 레이도 너처럼 본인의 능력을 몰랐지만, 지금은 각성해서 일리아의 최고의 마인드리더 마스터가 되었지. 난 너처럼 가능성이 있는 인재들을 발굴해 키워내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으로 느낀단다. 너에게는 네가 아직 모르는 아주 큰 씨앗이 있어. 그걸 발휘하도록 도와주도록 하지. 대신 우리 일리아를 위해 레이처럼 충성을 맹세해야 해.


근래에 우리의 주변국 중에 하나인 '로보토니아'라는 나라에서 이상한 낌새가 보이고 있어. '로보토니아'로 관광을 간 일리아 인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이 되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거든. 우리는 아무래도 이 일을 심상치 않게 여겨서 스파이단을 보낼 예정이야. 네가 그중에 한 일원으로 일해 주었으면 좋겠다.

너는 일을 시작하면서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야. 우리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따로 억지로 너를 교육시키거나 하지 않기로 했단다. 환경만 조성해 주고 스스로 너의 능력을 일깨우게 될 때까지 기다려줄 것이다. 너 자신이 너를 교육시키는 거지. 그런 다음에 네가 너도 모르게 각성하는 순간이 올 것이고, 커다란 희열이 널 기다리고 있겠지. 그래도 네가 궁금하거나 알고 싶은 것은 네 옆에 있는 레이가 알려줄 테니 걱정은 하지 말거라. 레이가 겉모습은 어린아이여도 영혼의 성숙도는 상당히 높단다.

음... 어떤 능력이 네게 있을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구나.


일리아의 일원이 된다면 너는 너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이고, 인정받게 될 것이야. 하지만 만약에 일리아에 남지 않겠다면, 다시 너의 세계로 돌려보내주도록 하마! 우리는 너의 의견을 존중한다.

자! 이제 네가 결정할 차례이니라. 우리와 함께 하겠느냐? "


"저는 잘 모르겠어요. 너무 당황스러워서요.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 일단은 생각할 기회를 주겠다. 일리아에 여행을 왔다고 생각하고 여기 며칠 머물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여라!"

"네... 좋아요. 그런데 제 동생이 많이 걱정을 할 텐데 어쩌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아 그리고 이것은 네 것이 맞느냐? 맞다면 두려워 말고 내게 가까이 와서 가져가도록 하여라."

여왕은 꾸러미를 엠마에게 건네주었다.

엠마가 떨리는 손으로 열어 보니, 엄마의 유품인 반지가 포함된 얼마 되지 않는 귀금속이 들어 있었다.

"네 맞아요! 제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이게 여기에 있죠?"

"우리 코니기사단 중에 까마귀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기사가 한 명 있단다. 반짝거리는 것은 모든 다 좋아하지.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훔쳐왔더구나! 대신 사과하마! 그럼 이만 가서 쉬도록 하여라."

부하를 대신해 사과하는 여왕이라니! 엠마는 여왕이 특별해 보였다.


엠마가 있던 세계에서 엠마는 그저 보잘것없는 인간이었다.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고 이룰 수 없는 허황된 꿈만 좇는 인간. 미래의 히키코모리?


그런데 일리아라는 세계가 노력도 안 했는데, 엠마에게 뛰어난 능력이 있다면서 엠마를 인정하고 멋진 일자리도 준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엠마를 신뢰해 주는 여왕이 엄마 같다. 엠마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만, 엠마가 궁전의 복도를 걸어가는 순간부터 일리아에 벌써 매료되었었다. 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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