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학교 생활

토론토 모나크파크 11학년

by 티나


1. 16살 되니 이런 일도 있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토론토에서의 첫 등교날, 나는 엄마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간절하게 바라고 바랐던 엄마와 함께하는 아침 등굣길이었다.


한국에서 중, 고등학교 등교할 때는 교복에 검은색 단화를 신고 학교에 갔던 나는, 캐나다에서의 학교 첫날, 도대체 무슨 옷을 입고, 어느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가야 하나 깊이 고민했다. 내가 다닌 캐나다 공립 고등학교는 교복도 없고, 드레스 코드도 심한 노출만 피하면 되는 학교였다. 나는 고민고민 끝에 최대한 튀지 않고 평범해 보이는 반팔 티셔츠를 하나 고르고 청바지를 골랐다. 에어컨 때문에 추울 수도 있으니 얇은 긴팔 후드 집업재킷도 챙겼다. 교실을 찾아가느라 길을 헤맬 수도 있으니 당연히 신발은 운동화로 골랐는데 최대한 오래 걸어도 발이 아프지 않은 신발로 골랐다. 학교에서 점심에 먹으라고 엄마가 김밥이랑 과일도 싸주셨다. 자유복을 입고 도시락을 들고 룰루랄라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가는 길. 생각해 보니까, 엄마와 함께 등교하는 아침은… 어? 생각해 보니 처음이었다.


늘 바쁘셨던 엄마는 내가 일어나면 이미 출근을 하신 뒤였고, 엄마가 출근한 사이 외할머니가 오셔서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고 혼자 학교에 갔다. 나와 오빠를 키워주신 외할머니는 혼도 많이 내시고 욕을 많이 하시는 분이셔서 많이 무서웠다. 늘 나에게 하셨던 말씀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말은 힘들게 일하고 온 엄마를 괴롭히지 말라는 말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느 날은, 나를 예뻐하지 않는 외할머니가 너무 미워서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엄마에게 떼를 쓴 적도 있었다. 사실 나를 예뻐해주지 않는 것보다 더 싫어했던 외할머니의 모습은 우리 아빠 흉을 많이 보신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대나무숲이었다. 엄마는 3교대하는 대학 병원 간호사 생활과 불행한 결혼 생활의 고충들을 외할머니에게 터놓고 얘기했다. 나는 모녀의 험담을 들어야 하는 환경에 있던 외로운 어린아이였다. 그 모녀 사이가 나는 종종 질투가 나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부터 내 얘기는 들어주지 않으셨고, 본인의 힘듦을 털어놓기 바쁘셨다. 칭찬을 받고 싶어서 나는 무엇인가를 잘할 때마다 엄마의 칭찬을 바랐지만, 엄마는 칭찬보다는 더 잘하는 친구들에 대해서 자극을 받으라고 말하셨다.


나보다 5살 많던 오빠도 나한테는 먼 가족이었다. 오빠는 버럭 화를 잘 냈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는 오빠에게 다양한 이유로 자주 혼났고 많이 맞기도 했다. 한 번은 구운 불고기햄을 아침에 밥이랑 먹고 있는데 햄에 비해 밥을 조금 먹는다고 오빠가 화를 내다가 실수로 포크로 내 얼굴을 찔렀다. 볼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고 그 후로 병원에 갔었는지 어찌 해결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주 오랫동안 볼에 파임 자국이 있었을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또 오빠가 어릴 때 나를 자주 때렸던 곳은 배였다. 오빠는 발로 내 배를 공 차듯이 뻥 찼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빠와 내가 집에 단 둘이 있는 적은 거의 없었고, 외할머니나 부모님이 계셨을 것 같은데 때리는 오빠로부터 나를 구해준 어른은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내 기억에는 오빠가 중학생 즈음 되었을 때, 다행히 그 폭력이 점차 없어졌던 듯하고 나중에 오빠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철없던 어린 시절 나를 괴롭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서 그 이후로 남매 사이가 좀 회복되었다.


외로운 나의 어린 시절, 아빠는 나에게 유일하게 칭찬을 해주는 가족이었다. 아빠는 나에게 자주 “우리 딸 베스트다!”라고 해주셨다. 애정이 결핍되어 있고 부모와의 시간이 늘 고팠던 나는 아빠의 칭찬이 참 좋았다. 나한테 그런 아빠를, 흉보고 욕하는 엄마와 외할머니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나의 어린 시절 흔한 하루의 일과 중에는 “아빠 욕 내 앞에서 제발 하지 마!”하며 엄마와 외할머니에게 울며 소리치다 방 문을 쾅 닫고 베개가 흠뻑 젖도록 울던… 슬픈 날들이었다. 하굣길에 비가 억수로 온다던가, 갑자기 몸이 아파서 조퇴를 한다거나 그런 날에 친구들은 엄마가 학교 앞에 마중 나와 있었는데, 나는 그런 친구들을 자주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16살이 되어서야 나는 엄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엄마가 싸주신 점심 도시락을 들고, 엄마와 함께 등교를 했다. 그동안 외로웠던 나에게 16살이 되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나는 대사를 잘 외우지만, 애드리브는 안 되는 배우입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이민자들이 많이 있는 토론토 콕스웰 (Coxwell) 지역 공립 고등학교 모나크파크 컬리지에이트 (Monarch Park Collegiate)였다. 그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문방구집 아저씨네와 20분 정도 거리로 가까웠고, 한국 유학생이 한 명도 없어서였다. 우리가 살던 100년 넘은 낡은 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였는데, 학교 첫째 날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학교가 시작하기 며칠 전부터 학교에서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이 나에게 물어볼 예상 질문들을 공책에 써보기도 하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들에 대한 답이었는데, 몇 번이고 연습해 보았다. 꼭 무대에 서기 전 느낌이랄까.


“나는 한국에서 온 지 두 달 되었어. 내 이름은 티나야. 만나서 반가워!”


간단한 내용인데 달달 외웠다. 누가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도 줄줄 나올 지경이었다. 꼭 배우가 작품에서 대사를 외워서 연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예상대로 매 수업 시간마다 선생님들은 자기소개를 시켰고 외운 대사대로 나는 성공적으로 ‘자기소개 무대’를 실수 없이 마칠 수 있었다.


문제는 자기소개를 하고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다른 질문을 하면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예상에 벗어나는 질문들은 대답을 외운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붙임성은 좋은 편인데 말문을 더듬다니! 약간 창피하기도 하고 속상했다. 장난스러운 질문들을 들어도, 나는 어떻게 농담을 받아쳐야 하는지 서툴러서 진지하게 대답하기도 했다. 작품의 대사는 잘 외우는데 재치와 순발력 있게 애드리브를 받아치지 못하는 배우 같았다.


한국에서는 새 학기가 되면 자기소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속상한 적이 없었다. 장난스러운 질문에는 장난으로 받아치며 새 학기 첫날부터 친구들을 사귀었다. 집에서는 나와 대화하는 가족이 없었지만, 밖에서 나는 투머치토커였다. 그렇게 발표하고 말하는 것을 크게 어려워한 적이 없는 내가, 캐나다에 오니 상대방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정확히 잘 이해를 못 해서 유추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내가 말로 내뱉는 모든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였다. 말을 힘들게 해 놓고도 ‘아,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문법도 틀리게 말했네!’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내게는 영어 공부라는 짐이 다른 원어민 친구들보다 하나 더 들려있었다.


어릴 때 3년 정도 ECC 영어 학원을 다녔었는데 덕분에 나는 영어를 읽을 때 발음만은 한국어 억양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현지인들이 빨리 말하는 영어를 알아듣고 대답하고, 또 순발력 있게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원어민친구들은 굳이 할 필요 없는 영어 듣기와 말하기 공부를 해야 했다. TV 시청이 취미였던 나는 프렌즈, 오프라 윈프리 쇼, 엘렌 쇼, 디즈니 영화들을 자막과 함께 보며 영어와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니 단어를 조금씩 더 알아듣게 되는 것 같고, 의사소통이 되는 느낌은 토론토에 온 지 3개월-6개월 정도 후부터였던 것 같다.


참 감사하고 다행인 것은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나를 호기심을 갖고 친절하고 천천히 말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도 생각나는 분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살았던 트레이시였다. 나이는 30대-40대 정도 되는 금발 곱슬 단발머리에 하늘색 눈을 가진 예쁜 여자분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마다 나와 엄마를 보면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셨다.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7층까지 올라갈 때까지 우리 모녀는 트레이시와 5분 영어 듣기, 말하기 수업을 듣는 것처럼 초집중해서 대화했다. 우리가 자주 대화를 못 알아들을 때마다 트레이시는 “너는 한국어도 하고, 영어도 하잖아. 나는 영어밖에 못 해! 모국어 아닌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거 참 대단한 것 같아.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줬다. 그런 말을 해주는 친절한 이웃이 참 고마웠다.


영어 실력이 좀 늘어서 나도 일방적으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닌, 조금씩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여러 배경의 사람들과 영어라는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벅차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를 통해 나는 캐나다라는 나라와 친해지게 되었고, 여러 나라 출신의 이민자들과 대화하며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반대로,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외교관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미드 배우들처럼 영어가 촤르르 나오지는 않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떠난 지 20년이 가까이되어 가는 지금, 영어가 줄줄 나오냐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금도 들리는 단어, 주변 환경, 상대방의 표정과 제스처들을 조합해서 이 뜻인가 아님 저 뜻인가 눈치로 때려 맞추지만 여전히 예상치 못한 애드리브들은 나를 괴롭힌다.


나는 대사를 잘 외우지만, 여전히 애드리브는 어려운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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